에티오피아 출신 페카두씨가 보는 한국사회
"19년 전 난민 신청 당시, 박대 받는 기억 생생
한국인 다정하지만 '귀화인=외국인' 시선 여전"
한국의 성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주민등록증. 거기에 적힌 그의 이름은 '페카두원디무투루'이다. 페카두는 에티오피아에서 원래 그의 이름이었으나, 한국인이 되면서 성(姓)이 됐다. 원디무는 아버지의 이름, 투루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그의 뿌리를 보여준다.
에티오피아의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지금은 예쁜 딸을 둔 53세의 평범한 한국인 아버지이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한국으로 와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2012년 귀화했다.
올해 2월 13일은 한국에 첫 난민 지위 인정자가 탄생한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난민 인정률은 고작 1%(2020년 기준)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크게 못미치면서도, 난민에 대한 혐오는 이상하리만치 들끓는 나라 한국. 페카두씨를 만나 그가 한국에서 겪은 차별과 어려움, 그런 상황에서도 그를 도와줬던 이들에 대한 고마움, 한국 사회가 되돌아 봐야할 문제들을 들어봤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생생한 19년 전 그날
“난민인정 신청서류를 내자마자 관리자가 읽어보지도 않고 ‘안 된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담당자가 굉장히 화가 나 있더라고요.”
지난 6일 서울 동작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페카두씨는 2002년 4월 난민신청 당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날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현 서울 출입국ㆍ외국인청)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 하나까지 모든 장면을 잊지 못한 듯 했다.
페카두씨는 “서류접수 담당자가 굉장히 공격적인(aggressive) 말투로 ‘난민신청을 거절한다’고 말했다”며 “이유를 묻자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그는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황당해 항의했더니, 조금 후에 더 높은 직급의 담당자가 와서 ‘서류를 검토해볼 테니 현재 머물고 있는 모텔(서울 이태원 소재)에서 아무데도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며 “꼬박 한 달 동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모텔비를 지불하며 기다렸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페카두씨는 결국 금전적 어려움을 호소한 끝에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가 받았다. 그는 “당시는 한국이 난민신청을 받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이라 제도상 미흡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며 “공무원들도 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페카두씨는 1999년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입국한 후 곧바로 난민신청을 하지 않았고, 이 점이 정부 당국의 불신을 샀다. 그는 “한국 정부는 내가 약 3년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체류연장을 목적으로 난민신청을 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가 난민신청을 미룬 이유는 가족의 안전 때문이었다. 주한 에티오피아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누나의 신변이 걱정됐다. 페카두씨는 “누나는 애초 운전기사 자격으로 대사관에 취직했는데, 티그리냐족 출신인 대사가 ‘오로모족이 모는 자동차는 탈 수 없다’며 누나에게 청소부 직책을 맡기는 등 대놓고 차별을 하던 상황이었다”며 “이 상황에서 내가 난민신청을 하면 누나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누나가 2002년 대사관 업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난민신청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난민신청을 한 후 그의 누나는 본국에서 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지 못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그가 한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 박해 피해 한국행
에티오피아는 1991년 멜레스 제나위가 실권을 장악한 이후 20여년간 독재정치가 이어졌다. 이 기간 전체 인구의 6%에 불과한 티그리냐족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현대판 과두정치였다. 오로모족(전체 인구의 약 34%) 출신인 페카두씨는 이 같은 현실에 부당함을 느끼고 1993년 대학을 중퇴한 뒤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오로모자유전선당(O.L.F)의 교육담당자로 시민들에게 당시 정권의 부당함을 알렸다. “에티오피아는 각 부족들의 거주 구역이 나뉘어져 있는데 병원, 학교, 대중교통 등 공공시설은 모두 티그리냐족 거주지에 몰려 있었어요. 왜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이 같은 시설이 들어오지 않는지 알리는 게 주 업무였습니다.”
당원활동을 시작한 지 약 1년 후 그는 정권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이 시위에서 수십명의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는 광경을 목격했다. 페카두씨도 3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고, 출소 후에는 정부가 취업을 막았다. 정치탄압의 일환이었다. 그는 “약 6년간 교회 업무를 도와주면서 버티다가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결국 1999년 교회컨퍼런스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도착했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취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이어나가기 쉽지 않았다”며 “주변의 도움을 받아 정말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냈다”고 회상했다.
난민인정 과정도 지난했다. 그는 “난민신청 후 약 6개월이 지나서 정부로부터 인터뷰를 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인터뷰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며 “출신 지역, 대학과 전공, 가족사항, 민주화 운동 과정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고, 관련 날짜를 하나하나 교차 검증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처음의 편견이 어느 정도 희석됐는지, 그는 10여차례의 인터뷰를 거친 끝에 2004년 12월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언론이 부추긴 난민 혐오와 무시
그는 한국의 제도권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을 갖고 곧장 부천의 한 공장에 취직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화는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번은 용산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의정부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제 출신지역, 가족 관계, 취업상황 등을 묻더라고요. 또 본국에 계신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있냐고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다짜고짜 ‘이 X발 새끼야!’라며 욕을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이 놈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너무 무서워서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어요.”
이 같은 직접적인 차별이나 혐오까지는 아니어도 은연 중에 무시를 당한 경험도 있었다. 한 직장 동료는 “너 한국에 와서 신발 처음 신어봤지?”라고 묻기도 했고, 또 다른 동료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옷을 벗고 춤추는 TV속 장면을 가리키며 “이 중에 너희 누나는 누구야?”라는 질문도 했다.
그럼에도 페카두씨는 “한국 사람들의 본성은 착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이 아프리카 출신자들에게 특이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 때문”이라며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은 내가 한국말을 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면 정말 다정하게 대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19년간 나에게 도움을 준 한국인들이 많다”며,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를 꼽았다. 그는 “2010년 김 변호사가 경기 안산시에서 법률자문을 하고 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는데, 이듬해 귀화신청을 할 때 서류작업을 무료로 해줬다”며 “지금은 집으로 초청해 함께 저녁을 먹을 만큼 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국적 '한국'돼도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
페카두씨는 2012년 귀화해서 한국인이 됐다. 이듬해 아주대에 유학 중이었던 에티오피아 출신 학생과 결혼식을 올렸고, 현재는 자동차부품제조업체에 근무 중이다. 약 250여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아내와 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여느 한국인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있다. 그가 한국인임에도 한국사회가 여전히 그를 외국인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귀화 직후 휴대폰 케이스 제작업체의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지만 “한국인이 아니면 취직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귀화를 했기 때문에 이미 한국인”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국제도는 그를 국민으로 인정했지만, 한국문화는 여전히 그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 같은 인식이 다문화 교육의 부족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루는 딸 아이에게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물었더니 ‘에티오피아 사람’이라고 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니야, 너는 한국사람이야’라고 말해줬는데 딸이 ‘유치원 선생님이 에티오피아 사람이라고 했어’라는 거예요. 유치원에 항의를 하니까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더라고요. 그 다음에 딸에게 물어보니까 ‘선생님이 나도 한국사람이라고 가르쳐줬다’고 하더군요. 이 일을 통해서 한국사람들이 나쁜 감정이 있어서 저와 제 가족을 외국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몰랐던 것뿐이에요. 다문화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이런 인식이 금방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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