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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도시의 매력

입력
2021.02.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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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장쑤성 ⑤ 쑤저우 졸정원과 쿤산 천등고진

쑤저우 평강가에서 신랑신부가 웨딩 사진을 찍고 있다.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에서 신랑신부가 웨딩 사진을 찍고 있다. ⓒ최종명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항’이라 했다. 청나라 중기의 사회 비판 소설 홍루몽 제1회에 인간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부귀풍류의 땅 고소(姑?)’가 등장한다. 쑤저우의 옛 이름이다. 소설의 서두를 이끄는 진사은과 가우촌이 살던 곳이다. 이야기는 서쪽 성문인 ‘창문(??) 밖 10리 산당(山塘)’에서 시작한다. 대보름날 밤 진사은은 애지중지하던 어린 딸 영련을 잃어버리고 폭삭 늙는다. ‘항저우에 서호가 있고 쑤저우에 산당이 있다’라고도 한다. 수향 풍광이 아름다운 산당으로 간다.

쑤저우의 수향 산당 입구. ⓒ최종명

쑤저우의 수향 산당 입구. ⓒ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백거이 기념관. ⓒ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백거이 기념관. ⓒ최종명


천당에 비유되는 쑤저우의 아름다움, 산당과 졸정원

제(堤)와 당(塘)은 모두 제방이다. 항저우의 서호에 백거이가 쌓은 백제(白堤)가 있다. 백거이는 822년 항저우 자사로 근무를 시작해 825년 쑤저우 자사로 발령을 받았다. 산당 초입에 기념관이 있다. 조각상과 함께 산당을 보수한 업적이 펼쳐져 있다. 지상의 천국이라는 항저우와 쑤저우를 모두 거쳤으니 행복한 시인이었을까? 병환을 얻어 사직한 후 쑤저우를 떠나며 별소주(??州)를 남겼다. ‘위풍당당한 쑤저우 백성(浩浩姑?民)’과 헤어지면 ‘무정한 삶을 견뎌야 하리(去郡能无情)’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보다 쑤저우와의 이별이 아쉬웠다.


쑤저우의 수향 산당 도랑에 유람선이 즐비하다. ⓒ최종명

쑤저우의 수향 산당 도랑에 유람선이 즐비하다. ⓒ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봉긋한 석공교ⓒ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봉긋한 석공교ⓒ최종명

산당은 문화거리로 조성돼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흐르는 도랑 옆으로 가옥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다. 가옥 바깥으로 골목이 조성돼 있다. 공예품이나 먹거리 파는 가게가 있고 좌판도 흔하다. 유람선이 오가며 차나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서너 개씩 한 줄로 연결된 홍등이 발처럼 걸렸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석공교는 도랑과 입을 맞춰 여러 모양의 원을 꾸민다.

쑤저우 수향 산당의 오래된 골목 첸샤오주룽에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오래된 골목 첸샤오주룽에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오래된 골목 첸샤오주룽에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최종명

쑤저우 수향 산당의 오래된 골목 첸샤오주룽에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최종명

도랑에서 살짝 벗어나 첸샤오주룽(前小?弄)으로 들어간다. 북방 골목을 후퉁(胡同)이라 하는 것처럼, 강남 지역은 룽탕(弄堂)이라 부른다. 꼬불꼬불한 길을 걷는데 빨래가 사방에 걸렸다. 집과 집 사이를 대나무로 연결하고 옷 소매를 연결한다. 마치 옆으로 나란히 줄 맞추듯 빨래가 공중에 매달렸다. 습기가 많아 수향이지만, 맑은 날이면 이런 진풍경이 등장한다. 햇볕이 물기를 앗아가니 사람 사는 향기가 난다. 세탁기에서 방금 꺼낸 옷가지처럼 풋풋하다.

쑤저우 평강가 도랑의 돌다리.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 도랑의 돌다리. ⓒ최종명

성문 안에 역사문화거리인 평강가(平江街)가 있다. 남북으로 흐르는 도랑은 돌다리를 건너 오갈 수 있다. 도랑과 붙은 담장에 넝쿨이 오르내리고 담백한 분위기와 어울린 홍등도 걸려 있다. 가끔 쪽배가 다리 아래로 지나다닌다. 양쪽으로 골목길이 1㎞나 이어진다. 건너편에서 신랑신부가 사진 찍는 모습도 가깝게 보인다. 부유한 지역이어서 옷차림이 화려하다. 한산한 거리라 오히려 낯설다.

쑤저우 평강가의 카페와 다도 학원.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의 카페와 다도 학원.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에서 곤곡을 공연하는 복희회관 포스터.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에서 곤곡을 공연하는 복희회관 포스터. ⓒ최종명

공예품이나 특산품을 파는 가게, 찻집이 즐비하다. 꽃단장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전통 다도를 배울 수도 있다. 예쁘게 치장한 가게가 줄줄이 이어진다. 복희회관(伏羲??) 안내판이 나타난다. 베이징에 경극이 있다면 장쑤성 남부에는 곤곡(昆曲)이 있다. 쑤저우 바로 옆 쿤산이 발원지다. 곤곡의 대표작인 모란정(牡丹亭)을 홍보하고 있다. 명나라 희곡작가 탕현조의 작품으로 두려랑과 류몽매의 러브스토리다. 꿈과 죽음도 초월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는 내용이다. 곧 곤곡 발원지를 갈 예정이라 더 반갑다.

쑤저우 평강가의 간식 파는 가게에 다양한 음식이 진열돼 있다.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의 간식 파는 가게에 다양한 음식이 진열돼 있다.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에서 낱개로 하나씩 사서 먹은 간식. ⓒ최종명

쑤저우 평강가에서 낱개로 하나씩 사서 먹은 간식. ⓒ최종명

흥미로운 간식 가게가 허기를 건드린다. 원판에 담긴 음식이 15가지나 있다. 낱개로 파니 하나씩 골랐다. 배 모양으로 만든 게맛살인 세황촨(蟹?船), 행운을 주는 잉어 모양의 팥떡인 넨넨여우위(年年有?), 투명한 새우만두 수이징샤쟈오(水晶??), 비췻빛 고기만두 페이추이루러우바오(翡翠?肉包), 옛날 화폐 모양으로 코코넛 가루로 만든 떡에 꿀을 바른 황진가오(?金?)와 식빵 튀김까지 담았다. 모두 20위안(약 2,500원)으로 도랑 앞에 앉아 하나씩 맛을 본다. 쌀가루나 밀가루로 만들어 대체로 심심한 맛인데, 팥 맛이 달콤한 넨넨여우위가 제일 낫다. 작명의 맛을 보는 느낌이다.

쑤저우의 원림 졸정원 입구. ⓒ최종명

쑤저우의 원림 졸정원 입구. ⓒ최종명

평강가를 통과하면 졸정원(拙政?)이 있다. 명나라 시대 어사를 역임한 왕헌신이 처음 지은 저택이다. 강남의 풍취를 담은 정원으로 원림(?林)이라 부른다. 졸정원을 비롯해 쑤저우에 있는 원림 9개를 모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하고 있다. 관리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 후 지었다. 관리였던 자가 편하게 여생을 보내려면 모름지기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생각 없이 작명하면 큰일 날 수 있다. 3세기 서진의 반안이 지은 한거부(?居?)가 딱 좋았다. ‘쓸모 없는’ 또는 ‘우둔한’ 사람이라는 뜻의 졸자(拙者)가 수없이 등장한다. 정(政)에 대한 표현도 정치가 아닌 일상의 집안일에 가깝다.

쑤저우의 원림 졸정원의 호수와 정자. ⓒ최종명

쑤저우의 원림 졸정원의 호수와 정자. ⓒ최종명


쑤저우 원림 졸정원 호수의 연잎. ⓒ최종명

쑤저우 원림 졸정원 호수의 연잎. ⓒ최종명

5만2,000㎡ 면적으로 호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정자와 저택은 돌다리로 연결돼 있다. 물이 많아 원앙도 돌아다니고 연잎이 쑥쑥 자라고 있다. 넓기도 넓어 잎으로 호수를 다 메운 듯하다. 수면에 거의 붙은 잎 주위로 잉어가 헤엄친다. 잔물결 없이 고요해 그림자가 또렷이 반영된다. 끝자락을 옷깃 세우듯 만들어 관광객은 동전 던지기 시합을 즐긴다. 수북하게 쌓일 틈도 없이 누군가 가져가는지도 모른다.

대쪽 사상가 고염무의 고향, 쿤산의 천등고진

쿤산 천등고진의 도랑과 돌다리. ⓒ최종명

쿤산 천등고진의 도랑과 돌다리. ⓒ최종명

졸정원을 나와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쿤산으로 간다. 쑤저우가 관할하는 현급시로 상하이와 붙은 도시다. 삼국시대 오군(?郡) 관할 누현(??)이었다가 6세기 초 남조의 양(梁)나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1,500여년 전에 세운 진봉탑(秦峰塔)이 멀리서도 보인다. 38.7m의 7층 전목탑이다. 돌다리를 건너서 마을로 들어선다. 도랑 옆 골목에서도 탑이 보인다. 서민이 사는 허름한 집 사이로 스치듯 지나니 길이 넓어지고 저택이 나타난다.

천등고진의 고염무 고거 정문. ⓒ최종명

천등고진의 고염무 고거 정문. ⓒ최종명

천등고진이 유명한 까닭은 고염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왕조 교체기의 인물로 왕부지, 황종희, 당견과 함께 당대 4대 사상가다. 초기에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지향했으나 청나라가 기틀을 잡자 저술에 몰두하며 순응했다. 성리학의 공허한 논리에 반대하고 실증과 실용을 추구하는 경세치용을 주장하며 사회계몽에 주력했다. 말싸움으로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는 현실 자각이었다.

천등고진 고염무 고거 담장의 필부유책과 중국공산당 깃발. ⓒ최종명

천등고진 고염무 고거 담장의 필부유책과 중국공산당 깃발. ⓒ최종명

‘일지록(日知?)’에 ‘나라 지키는 일은 황제나 녹봉 먹는 신하나 모두 지킬 일이며, 천하 지키는 일은 평범한 필부라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왕조의 멸망에 누구나 책임이 있다는 뼈아픈 각성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다행일까? 청나라 말기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변법자강을 펼친 양계초가 200년 전 고염무의 처방전을 들고나왔다. ‘천하흥망(天下?亡), 필부유책(匹夫有?)’이라 외쳤다. 양쪽 담장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어쩌자고 낫과 망치가 그려진 중국공산당 당기가 유난히 붉단 말인가?

천등고진 고염무 고거 청정에 '도숭예범'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천등고진 고염무 고거 청정에 '도숭예범'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청청(??)이다. 지붕을 덮은 나뭇가지가 아래로 늘어서고 조명을 밝히니 밖에서도 편액과 대련이 보인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급제한 조카 서건학의 도숭예범(道崇?范)이다. ‘도의 숭고와 예의 모범’이라 직역해도 예우가 느껴진다. 청나라 말기 영국의 악랄한 아편 책동에 맹폭을 퍼부은 흠차대신 임칙서도 대련을 남겼다. 나라의 흥망이 ‘바람 앞에 등잔’인 시절이니 심정이 오죽했으랴.


예로써 덕의 기반을 닦아 뜻이 후대에 미치고 정치의 법도를 지키네(??德基?垂政矩)! 도를 숭상하고 가정에 모범이 되어 국가의 광채를 온 세상에 펼치네(道崇家范才蔚??)!

임칙서


천등고진의 고염무 고거 이안당. 주이존의 대련이 기둥에 적혀 있다.ⓒ최종명

천등고진의 고염무 고거 이안당. 주이존의 대련이 기둥에 적혀 있다.ⓒ최종명

청청을 지나면 명청(明?)이다. 두 왕조의 이름을 나란히 사용했다. 당호인 이안당(?安堂) 편액이 열린 문 사이에 딱 맞춘 듯하다. ‘평안을 선사한 집’이란 존경은 쿤산 지현을 역임한 요륜이 1870년 춘삼월에 쓴 작품이다. 극존칭은 문 바깥으로 보이는 기둥 양쪽에 적힌 대련이다. 고염무의 문우인 주이존의 필체다. 경전과 역사에 해박해 ‘명사(明史)’ 편찬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서체도 독특하지만, 그 뜻은 시공을 초월한 듯 현란하다.


자자손손 위대한 업적은 마땅히 목공과 금모에 비견되네(宜?子?位?木公金母)! 만백성을 위한 예리한 재능은 호랑이였고 용이 되었도다(?于兄弟才?季虎??)!

주이존


목공과 금모는 도대체 누구인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동왕공(?王公)과 서왕모(西王母)다. 양과 음의 정기를 지니고 남신과 여신을 대표한다. 최고의 신이며 신 중의 신이다. 음양 변화가 무궁한 오행에 따르면 동쪽에 목, 서쪽에 금이 위치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업적에 대한 칭송이다. 호랑이였다가 용이 되었다고 했다. 호랑이 앞의 계(季)는 계절의 마지막이란 뜻이다. 명말(明末)이다. 용 앞의 두(?)은 말할 필요도 없이 청초(?初)다. 왕조 이름을 대련에 쓰는 바보는 없다.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천등고진의 고염무 사당 정림사. ⓒ최종명

천등고진의 고염무 사당 정림사. ⓒ최종명

왼쪽으로 가면 정림사(亭林祠)다. 고염무는 본명이 고강(??)이었는데 명나라가 멸망하자 개명했다. 아래로 떨어진다는 강(降)과 발음까지 비슷하니 더 이상 쓰기 어려웠을 듯하다. 선비가 불꽃 염(炎)에 굳셀 무(武)까지 썼으니 적개심이 무섭다. 자는 영인(?人)이며 별호는 정림이다. 사람들은 정림선생이라 불렀다. 사당 안에 자그마한 묘지가 있다. 본처 왕부인과 합장한 무덤이다.

천등고진의 고염무 사당인 정림사에 본처와의 합장 무덤이 있다. ⓒ최종명

천등고진의 고염무 사당인 정림사에 본처와의 합장 무덤이 있다. ⓒ최종명

19세에 혼인했다. 상서를 역임한 명문가 여식을 본처로 맞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33세에 얻은 첩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37세에 다시 첩을 들인 후 낳은 아들은 다섯 살도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45세에 고향을 떠나 유람을 시작했다. 회갑에 즈음해 의사이자 문인으로 유명한 부산(傅山)이 ‘30대의 심장’을 지녔다고 부추겼다. 이 말에 고무돼 다시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68세에 본처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귀향하지 못했다. 상주가 없으니 고향에서는 난감했다. 막냇동생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마침 그 아들의 아들(손자뻘)이 둘이었다. 그중 하나를 요절한 아들의 양자로 삼아 장례를 치렀다. 항렬에 맞춰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불행은 멈추지 않았다. 여섯 살의 양자도 그해 사망했다. 잃은 나라를 되찾는 일만큼이나 대를 잇는 일도 어려웠다.

천등고진의 고염무 조각상. ⓒ최종명

천등고진의 고염무 조각상. ⓒ최종명

2년 후 말을 타다가 실족해 구토가 멈추지 않아 결국 사망했다. 다행스럽게도 65세에 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자지간의 의식을 치렀다. 양부 곁을 지키던 18세의 고연생은 3,000리 길을 운구했다. 고희의 영령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천등고진 천등관의 등잔 전시. ⓒ최종명

천등고진 천등관의 등잔 전시. ⓒ최종명


천등고진 천등관의 다양한 등잔과 도구. ⓒ최종명

천등고진 천등관의 다양한 등잔과 도구. ⓒ최종명

천등의 옛 지명이 천돈(?墩)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덩굴풀인 꼭두서니를 천초(?草)라 한다. 이 꼭두서니가 도랑 돈대 위에 무성하게 자라던 마을이었다. 수없이 많았던 돈대로 인해 천돈(千墩)이라 했다. 발음이 비슷하고 광명을 가져다주는 천등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청나라 말기 이씨 조상을 봉공하던 사당인 이택(李宅)에 등 기구를 전시하고 있다. 모두 1,133개로 기원전부터 민국 시대까지 망라했다. 나무, 돌, 대나무, 청동, 철, 유리, 도자기, 주석, 은 등 재료도 다양하다. 모양이나 용도도 달라서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모든 등잔에 불을 피우면 정말 가관이겠다고 상상했는데, 마을을 다 태우겠다는 생각에 이내 전시관을 나섰다.

천등고진 사택의 고견 기념관. ⓒ최종명

천등고진 사택의 고견 기념관. ⓒ최종명

사택(?宅) 간판이 보인다. 양자로 대를 이은 고염무의 12세 후손 고자옥이 20세기 초반 건축했다. 매부에게 증여한 저택이다. 사씨 집안으로 시집간 여동생을 위한 배려였다. 내부는 고견 기념관이다. 고씨 집안이 다시 회수했다는 짐작은 버려도 된다. 천등고진은 곤곡의 발원지 중 하나다. 원말명초(元末明初) 시대 희곡가이자 곤곡의 비조인 고견이 앉아 있다.

천등고진 고견 기념관의 곤곡 중 ‘완사기’ 재현 장면. ⓒ최종명

천등고진 고견 기념관의 곤곡 중 ‘완사기’ 재현 장면. ⓒ최종명

곤곡 무대극을 밀랍으로 소개하고 있다. 몽골과의 전쟁 중에 엄마와 헤어진 왕서란과 서생 장세륭의 사랑을 다룬 배월정(拜月亭), 명나라 멸망 후 반청 운동을 하던 후방역과 명기 이향군 사이의 인연을 다룬 도화선(桃花扇), 기원전 와신상담을 기획한 범려와 서시의 미인계를 다룬 완사기(浣??),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운명을 다룬 장생전(?生殿)도 있다.

천등고진 연복선사의 진봉탑. ⓒ최종명

천등고진 연복선사의 진봉탑. ⓒ최종명

진봉탑이 있는 연복선사(延福?寺)로 들어선다. 산문인 천왕전을 지나자마자 바로 탑이 나타나서 다소 놀랐다. 우리나라는 대웅보전 앞마당이 넓어 크고 작은 탑을 세우지만, 중국 사찰에선 드문 편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4면이 층층이 올라가며 좁아지는 모양이 예쁘장하다. 사람들이 ‘미인탑’이라고 부른다는데 이유를 알만하다. 중건을 반복했는데 송나라 시대 탑의 품격으로 1994년에 대규모로 보수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음전과 지장전, 재신전과 토지묘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천등고진 연복선사의 옥와불. ⓒ최종명

천등고진 연복선사의 옥와불. ⓒ최종명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옥와불(玉?佛)이다. 길이 8.9m, 높이 2.45m로 완전 일체형이고 무게는 32톤이다. 1999년에 미얀마에서 발견된 백옥 원석으로 제작했다. 채굴하는데 3년, 설계를 거쳐 작품을 완성하는데 2년이 더 소요됐다. 색감을 입히기 위해 1,500여개의 보석이 사용됐으며 부처의 가사는 순금으로 도금했다. 쿤산의 여행공예품 기업이 소장해 2004년 6월 6일 이곳에 자리 잡았다. 기네스 기록에도 올랐다.

천등고진 고염무 사당의 조각상 신위. ⓒ최종명

천등고진 고염무 사당의 조각상 신위. ⓒ최종명

고염무 고향이 참 소박하다. 관광객도 많지 않고 서민의 삶과 역사문화의 향내가 녹아 있어 골목을 누비니 마음이 편안하다. 고염무의 명성이 높아지자 한림원 학사 웅사리가 ‘명사’ 편찬을 제안했다. 벼슬을 주겠다는 말이다. 면산에 은거했다가 죽은 개자추와 멱라강에 투신한 굴원을 언급했다. ‘이렇게 한다면 개자추처럼 도피할 뿐 아니라 초나라를 위해 죽은 굴원을 본받겠다’고 했다. 거절도 대쪽이었다. 품위 있게 항의했다. 왕조 교체기에 혁명을 도모했고 울분도 품격으로 승화한 학자의 고향이 아니던가?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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