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시로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인 정치인 불법 사찰을 벌였다고 국정원이 16일 인정했다. 다만 구체적 사찰 내용과 다른 정권도 불법 사찰을 했는지 여부는 명확히 공개하지 않았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이날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과거 국정원의 사찰 사실을 인정했다고 정보위 여야 간사인 김병기·하태경 의원이 전했다. 사찰은 2009년 12월 16일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시로 시작됐다.
민정수석실은 ‘VIP(대통령) 통치 보좌, 정부와의 협조·견제 차원에서 여야 국회의원에 대한 신상 자료 관리가 필요하다. 민정수석실에서 자료를 수시로 축적하고 업데이트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민감한 사안이니 국정원에서 자료를 관리해달라’고 주문했다고 국정원이 16일 보고했다. 당시 민정수석은 이명박 전 대통령 핵심 측근인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이었다.
치밀했던 정치인 사찰
초기 사찰 자료는 민정수석실이 검찰, 국세청, 경찰 자료를 취합해 전달하면 국정원이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민정수석실이 요구할 때마다 전달하고 업데이트 하는 방식으로 관리됐다. 민정수석실은 ‘국정 방해 정치인 견제 차원의 정치인 비리 정보 지원’도 요청했다고 국정원은 보고했다. 정권 반대 세력을 '정보'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청와대에 있었다는 뜻이다.
민정수석실이 '해당 자료를 단순 외부 입수 자료라고 둘러대라'고 국정원에 치밀하게 주문한 사실도 확인됐다. 정치인 사찰과 자료 축적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박형준 동아대 교수가 연루됐다는 의혹에 대해 국정원은 “그런 근거는 (열람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불법 사찰이지만 전체 내용은 안갯속
이날 국정원은 "정치인·민간인 사찰 정보는 직무범위 이탈 정보여서 불법"이라고 규정했다고 국민의힘 간사인 하태경 의원이 전했다. 국정원법에 따른 국정원 직무 범위(국외ㆍ북한ㆍ방첩ㆍ대테러 등)를 넘어선 정치인 개인 정보 수집인 만큼 불법이라는 뜻이다.
다만 사찰이 어떤 수위와 방법으로 이뤄졌는지를 확인할 단서인 사찰 자료 내용은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국정원은 보고했다. 대부분의 정치인 사찰 자료에 대한 정보 공개 청구가 아직 이뤄지지 않아 국정원에 자료를 들여다 볼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를 보는 것 자체가 정치 개입 논란을 부를 수 있는 만큼, 국정원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노무현·박근혜 정부도 사찰?
국정원은 또 “(사찰 자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업데이트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박근혜 정부 때 있었다는 걸 확인하지 못해 (사찰이 지속됐을) 개연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의 국내 정보 업무를 중단시키면서 사찰도 함께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고 선을 그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사찰 여부에 대해 박지원 원장은 “없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하태경 의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불법 도청 사건이 있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 곽상언 변호사 등 대통령 친인척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들며 반박했다. 김병기 의원은 “적어도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정원의 공조직이 동원되는 그런 사찰은 없었다”고 의혹 확산을 차단했다.
사찰 실태, 공개는 시간 문제?
민주당이 주도하는 국회 정보위는 국정원 사찰 논란을 이대로 묻고 가지 않을 태세다. 정보위 차원의 의결 절차를 걸쳐 사찰 자료를 비공개로 열람하거나, 자료 공개를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박지원 원장은 “국정원 60년 불법사찰 흑역사 처리 특별법을 만들자”고 비공개 회의에서 제안했다. 국정원 사찰 대상으로 거론되는 범여권 정치인들이 개인적으로 정보공개 청구를 했거나 할 예정이어서,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전망이 많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