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생각하는 예술'이란 강의를 기획하기로 했다.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해마다 개최해 온 예술축전이 감염병의 위기로 속절없이 무산될 위기였기 때문이다. 공연과 전시를 아우른 이 페스티벌은 밀집, 밀폐, 밀접이란 3밀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3밀은 예술가와 관객의 직접적 소통과 생생한 현장성의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접촉의 공포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코로나 이후, 세상의 수많은 공연들이 맞이한 비극처럼 예술축전 역시 언제 열린다는 기약도 없이 휘발될 처지였다. 하지만 어렵게 수성했던 예산마저 공중분해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불용예산으로 날아가 버리기 전에 민첩한 전환이 필요했다.
언택트의 시류에 편승하자면 온라인 강의 외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만 공연과 전시를 희생시켜도 좋을 뜻깊은 주제를 발굴하고 싶었다. 열띤 논의 끝에 기후 위기를 예술로 각성시키자 의기투합했는데, 예술의 다양한 영역-음악, 미술, 영화, 사진, 미디어아트, 패션, 디자인, 연극, 예술치료 등-을 망라하고 있는 교·강사의 역량을 '지구를 지키기 위한 예술의 행보'로 결집시켜보기로 뜻을 모았다. 기후 위기에 대한 예술의 문제의식을 관통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는 예술계의 여러 노력을 발굴하기로 했다.
14개 온라인 강의가 줄줄이 촬영되던 때, 나는 교강사와 촬영 스태프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장인력의 식사 챙기기가 주요 임무였는데, 모든 의전이 그러하듯 허술하거나 섭섭하지 않은 대접이어야 했다. 5인 이상의 회합이 금지된 탓에 식당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그 대신 예산에 맞춰 꽤 그럴싸한 도시락 메뉴를 선택했는데, 이때 그럴싸하다는 가치 판단, 혹은 섭섭하지 않은 가격엔 화려한 플라스틱 용기의 지분도 상당했을 것이다.
예약된 도시락을 전화로 확정하려는 찰나, 촬영장 안에선 강사의 핏대 높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한국인이 1년 동안 쓰고 버리는 페트병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1,000개? 2,000개? 아닙니다. 무려 5,000개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플라스틱 사용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습니다." 강의는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미술작품으로 환경오염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미술가의 작업들, 플라스틱을 삼킨 채 고통스럽게 죽어간 고래와 바닷새들이 마음의 가책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화려한 용기로 무장한 도시락을 배달시킬 수 없었다. 대신 종이 포장의 샌드위치와 김밥을 먹자고 설득해 손수 날랐다.
부끄럽게도 이 양심의 가책은 일회성에 불과했다. 그 뒤에 이어진 식사는 다시 그럴싸한 플라스틱 도시락으로 회귀했으니 말이다. 교·강사와 스태프들에게 연거푸 허술한 식사를 제공했단 비난보다 지구를 해치는 가책이 훨씬 더 감당할 만했다. 지구를 지키는 예술의 힘을 북돋자며 의기투합한 현장이니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불편을 감수하자는 목소리가 도대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녹화 일정이 빠듯했으니 도시락 쓰레기를 휴지통에 켜켜이 쌓아올린 채 다시 촬영장으로 바삐 움직였다.
이어진 강의에선 공연과 전시 같은 예술 활동이 정작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아닌가란 반성을 다루고 있었다. 예술이 예술을 하느라 지구에 흔적을 남겼던 숱한 사례들, 환경과 생태에 대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행동은 반대로 하는 예술가들의 아이러니가 플라스틱 도시락만찬과 고스란히 연결되었다. 아픈 지구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 떠들면서도 오래된 관성에 매몰되는 처지가 부끄러웠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쾌적한 삶이 곧 지구의 고통임을 자각하는 것, '지구를 생각하는 예술'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변화부터 깨우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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