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울산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아!” 울산 동구 염포산 자락에 위치한 울산대교 전망대에 올라가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바다를 끼고 왼쪽 끝으로는 초대형 크레인과 대형 선박들이 늘어선 현대조선이, 가운데에는 석유화학공장들이, 오른쪽으로는 방금 조립을 끝낸 자동차들이 늘어선 현대자동차가 360도 파노라마로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울산을 움직이는 3개 산업인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산업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울산의 공업단지를 촬영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울산을 잘 아는 김호규 금속노조위원장이 왜 이 곳을 올라가보라 했는지 이해가 됐다.
울산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한국 산업화의 상징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다. 그 결과 울산은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가 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울산은 한국 산업화의 우여곡절,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왜 한국이 종합제철, 정유공장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요? 수입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데.” 1962년 초 울산을 방문한 미국 관계자는 건설이 중단된 정유공장을 돌아보고 이 같이 말했다. 5·16쿠데타 이후 발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야심차게 추진한 울산의 정유공장 건설이 자금 부족으로 중단됐을 때 지원을 받기 위해 미국의 관계자를 초청했는데, 당시 미국은 이처럼 '비교생산비설'을 내세우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비교생산비설은 19세기 초 세계 경제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의 리카르도라는 학자가 자국의 입장인 자유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다. 각 나라는 경쟁력이 있는 물건의 생산에 집중하고 경쟁력이 없는 물건은 수입해 쓰는 게 경제적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지금도 국제교역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경우 자동차 등은 영원히 미국 등에서 수입하고 봉제나 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잘못된 상식 하나는 박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외채를 빌려 저임금의 경공업 위주의 수출 주도 산업화로 경제성장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 됐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울산이다. 울산의 주요 산업이 봉제나 신발공장이 아니지 않는가.
박정희 정권이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소비재나 경공업이 아니라 철강, 정유, 조선 등 중화학 공업과 기간산업에 초점을 두어 수출 주도가 아니라 수입 대체 산업화를 추구하고 △필요 자본은 외채가 아니라 재벌의 부정 축재 재산 몰수와 놀고 있는 화폐 자산 등 국내 유휴 자본의 동원으로 충당하며 △금융기관의 국유화와 체계적인 경제계획 등 국가주도형 경제를 지향하고 △외화 획득을 위한 수출 증진도 공산품의 수출을 위한 경공업 위주의 산업화보다는 광물 등 1차 산업의 수출을 확대하며 △농어촌 고리채 탕감 등을 통한 농업과 공업의 동시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마디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아니라 중화학 공업화를 통해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보다 ‘민족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모델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를 보고 ‘사회주의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한 이야기지만, 원래의 경제개발 계획안은 민족주의적인 ‘낫셀주의’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은 북한의 자립적 경제발전을 알고 있었고 이에 뒤지지 않을 자립적 경제발전 모델을 추구하려고 한 것이다. 특히 국방을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이 필요했다.
이 모델에 따라 군부는 재벌들을 구속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했으며, 울산에 정유공장 등 중화학 공단을 짓기 시작했다. 나아가 미국 몰래 영국에서 새 화폐를 찍어와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인당 얼마 이상 새 화폐로 바꿔주지 않음으로써 놀고 있는 화폐들을 국가로 환수하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재벌들은 일종의 ‘파업’으로 대응했다. 자본은 노동자들처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파업을 할 필요가 없이 투자를 하지 않는 ‘투자 파업’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결과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정통성이 없는 쿠데타 세력에게 큰 타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었다. 앞에 소개했듯 자금 부족으로 공장 건설 등을 위해 원조를 요청했지만, 경제개발계획의 급진성에 놀란 미국은 오히려 원조 삭감으로 응수했다. 화폐개혁을 원점으로 돌리고 이를 주도한 장교들을 해고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박 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화폐개혁을 원상 복귀시켰고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했던 유원식 대령 등 민족주의적 장교들을 전역시키거나 권력의 핵에서 쫓아냈다. 재벌들은 공장을 지어 헌납하는 조건으로 풀어줬고, 시간이 흐르자 이 역시 후퇴해 원래 부정축재 환수액(322억원)의 5%의 벌금만 내는 것으로 끝났다.
문제의 울산 정유공장은 어찌 됐을까. 박 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의해 미국 걸프사에 25%의 지분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2,000만달러의 장기차관을 도입해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정유 산업이 다국적기업에 넘어간 것이다. 그나마 ‘자주적이고 개혁적으로’ 추진하려던 경제발전계획은 이렇게 변질되고 무너져갔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동결한 원조를 방출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강제한 제1차 경제개발계획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 수정안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박정희 경제발전 모델로 △정부투자를 줄이고 사적 자본의 역할을 확대하며 △중화학공업화를 줄이고 저임금 경공업 위주의 수출 주도 산업화를 추구하며 △외국자본의 활동을 자유화하며 재벌재산 환수 대신 외채를 통해 필요자본을 조달하는 것이다. 수정안 발표 후 박정희는 “5·16혁명은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울산이 경제개발계획 원안이 가졌던 ‘민족주의적인 자립경제’ 모델을 상징한다면, 수정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전태일의 분신을 가져온 청계천 봉제공장과 인분 투척으로 유명한 동일방직, 그리고 박정희의 몰락을 가져온 YH무역 등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집약적 경공업들이다. 어쨌든 수정안은 세계경제의 호황과 맞물려 경제성장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성공에 기초해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들어 미국식 비교생산비설에 빠져있는 경제기획원을 건너뛰고 한국개발연구원(KDI)을 통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어 중화학공업화를 다시 추진한다. 그 결과가 바로 울산의 또 다른 축이자 ‘한국경제성공의 상징’ 중의 하나인 자동차, 그리고 조선업이다.
이 산업들의 성공신화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성공신화 속에 숨겨진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박 정권이 이 같은 공장들을 짓기 위해 모든 중·고등학교 등록금에 국민저축을 포함해 강제 저축을 시킨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이 저축을 해야 했다. 정부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국민투자기금을 만들어 시장금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물가상승률보다도 싼, 장기 저리의 금리로 재벌들에게 빌려줬다. 다시 말해, 전망대에서 저 발밑에 보이는 거대한 공장에는 자식들을 중·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한 등록금을 만들기 위해 먹을 것도 못 먹고 땀을 흘려야 했던 가난한 수많은 부모들의 피눈물이 포함돼 있다. 이 점에서 이들 공장들은 어떤 면에서는 재벌 소유주들만의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은 현대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군대식의 ‘병영적 노동 조건’에서 이 같은 대규모 공업단지를 만들었고 세계적인 산재율을 보이는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에서 목숨을 걸고 일해 이들 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다. 악명 높은 산재율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거대한 울산단지를 내려다 보고 있자, 자립적 경제발전을 꿈꾸다가 5·16쿠데타 초기에 미국의 압력으로 쫓겨난 젊은 민족주의적 장교들부터, 병영적인 공장 체제와 작업 조건 속에서 이 같은 공단을 만들고 유지하다가 목숨을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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