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하던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호가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50일이 지나도록 선박과 선장은 억류돼 있다. 나포 한 달여 만인 이달 2일 선원 19명만 ‘인도주의적 조처’라는 명목으로 석방됐다. 이란은 선박 ‘해양오염’ 문제를 나포 사유로 들었으나 국제외교가에서 이를 그대로 믿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4가지 관점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바이든, 석유대금, 미중 경쟁... 복합 요인 중첩
우선 나포 시기를 살펴봐야 한다. 피랍 시점인 1월, 이란은 안팎으로 정치ㆍ군사적 격변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27일 2000년대 초반까지 이란의 핵개발을 진두지휘했던 모센 파크리자데가 피살됐다. 그것도 이란 안에서였다. 한국케미호 피랍 전날(3일)은 미군에 의해 살해된 가셈 솔레이마니 전 쿠드스군(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 사망 1주기였고, 4일 당일은 이란이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 상향하겠다”고 공표한 날이었다. 이란 핵합의(JCPOAㆍ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 규정된 농축 한계(3.67%)를 크게 웃도는 수치로 핵무기 제조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모든 일련의 흐름이 미국의 정권 교체(1월 20일)를 의식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둘째, 이란의 석유대금 문제다. 하루 수십 척의 선박이 드나드는 호르무즈해협에서 하필 한국 선박을 노린 것은 한국 내 동결된 이란의 석유대금과 연결된다. 2019년 미국의 제재로 한국 금융권에 묶인 70억달러(약 7조7,735억원)가 넘는 석유대금을 하루 빨리 받아내려는 협상 전략으로 선박 나포를 해석할 수 있다.
셋째, 이란의 경제적 위기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이란 정부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경제 상황은 악화했고 백신과 치료제 구입 비용 부담은 커졌다. 여기에 유엔 총회 투표권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 분담금(연 1,625만달러)이라도 납부해야 했다. 동결자금이 절실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중 패권 경쟁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으로, 이란은 중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협력국으로 일종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선박 억류 직후 미국이 즉각 석방을 요구한 데 반해 중국은 ‘선박 나포는 정상적’이라고 주장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이란이 한국 선박 억류로 새로 출범한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핵합의 복귀를 압박하려 한다는 주장과도 통한다.
결국 '핵 문제' 해결이 관건
이처럼 이번 사건의 배경은 매우 복합적이다. 그럼에도 나포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이란 핵합의다. 이란 입장에서 핵합의는 대미 갈등의 핵심 이슈이자 최우선 해결 과제다. 이란 핵 문제를 이해하려면 과거 이란이 미국의 우방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란이 처음 실험용 원자로를 도입한 건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1957년 ‘원자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약속한 직후다. 이후 이란은 1959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정회원이 됐고 1970년 핵확산방지조약(NPT)도 비준했다. 이스라엘과 군사협정 체결 및 탄도미사일 협력 개발 등 소위 친미적 핵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하며 1979년 이전까지는 옛 소련의 남하를 막는 미국의 우방이었다. 그러나 그 해 이슬람혁명과 주이란 미대사관 444일 인질사건으로 두 나라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이란 핵 문제는 2002년 국제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9ㆍ11 테러 이듬해 ‘무자헤딘 할크’로 알려진 반체제 단체 ‘이란국민저항협의회’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이 때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이란과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고, 미ㆍ이란 관계는 줄곧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란과 북한 핵 문제가 하나로 묶여 국제적 관심사로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20년 가까이 갈등과 협상은 반복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정밀 타격, 소규모 공격 시나리오 등 군사적 대응론을 들고 나왔고, ‘올림픽 게임’이란 코드명으로 나탄즈 핵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단행한 적도 있다. 6차에 걸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 2010년대 수 차례 이란 핵과학자 피살과 미국의 독자 제재가 있었다. 물론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주도해 테헤란 합동선언문(2003년 10월), IAEA 추가 프로토콜 서명(2003년 12월), 파리합의문(2004년 11월), 연료 교환 합의(2009년 10월) 등 평화적 해결을 위한 여러 성과도 없지 않았다.
이란 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는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우려할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설이 제기되자 당시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우겠다” “홀로코스트는 하나의 신화” 등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저항 의지를 다졌다. 캐나다 진보학자 미셸 초스도프스키는 저서 ‘제3차 세계대전 시나리오’에서 “제4차 세계대전의 무기는 막대기와 돌일 것”이라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이란 핵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란·北 핵 이슈 함께 고민해야
이란 핵합의는 이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2015년 7월 14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과 독일(P5+1)이 이란과 손을 맞잡고 내놓은 결과물이다. 골자는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만 핵 프로그램 및 핵 에너지 권한을 갖는 대신, IAEA가 이란의 핵 활동 억제를 검증하면 서방은 대이란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것이다. 희망의 빛 줄기가 보이는 했던 이란 핵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다시 미궁에 빠졌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우기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은 ‘ABO(Anything but Obamaㆍ오바마만 아니면 돼)’ 정책 일환으로 핵합의에서 탈퇴했고 미ㆍ이란 관계는 다시 최악으로 치달았다. 4년의 냉각기를 거쳐 대선에서 승리한 바이든 대통령이 핵합의 복귀 명분을 찾던 중 한국 선박 나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의도치 않게 양국 대립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희생양이 된 셈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비극적 운명’을 상생과 협력, 발전과 진보라는 ‘행운의 운명’으로 바꿀 수도 있다. 한국케미호 피랍 및 해결 과정에서 고려시대 서희 장군처럼 한미 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고 이란과의 관계도 회복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외교술을 발휘해야 한다. ‘핵 없고, 평화로운 지구’라는 대의 명제 아래 이란 핵 해결 틀(P5+1과 이란의 협상)과 북핵 해결 틀(6자회담 및 한ㆍ미ㆍ북 협정)을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논의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은 이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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