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엄마] <3>가수 인순이 모녀-딸 박세인
편집자주
엄마와 딸의 시간은 어떻게 교차하고 어떻게 포개질까요. 여기 모녀가 있습니다. 가수 인순이(본명 김인순ㆍ64)씨와 딸 박세인(27)씨입니다. 인순이씨는 ‘라이브의 디바’로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가수고, 세인씨는 미국 스탠퍼드대 출신에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한 경력으로 유명하죠. 지난해 8월엔 단편영화 ‘끈’의 OST ‘엄마와 딸’을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세인씨를 2월 24일, 인순이씨는 이튿날인 25일 각각 만났습니다.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모녀의 역사, 어떨까요. 두 사람의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모녀의 시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먼저 딸의 얘기입니다.
엄마는 TV로 보는 게 당연했던 딸
스탠퍼드 출신에 MS… 화려한 경력
식이장애, 공황발작 겪으며 바뀐 삶
“실패들이 일군 엄마의 성공, 내 모토”
‘엄마’하면 떠오르는 첫 기억요? 음, TV 속의 엄마! 맞아요, 화려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TV 속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했어요.
제가 1994년 9월생이거든요. 엄마가 그 무렵 활동이 왕성했잖아요. 늘 TV 음악 방송 무대에 서거나 행사를 다녔죠. 엄마는 대개 제가 잠든 이후에 집에 들어오고 엄마가 잘 때 저는 일찍 일어나서 유치원이나 학교에 갔으니까. 예전부터 그래서 아빠와 저는 우스갯말로 “우리는 국민과 엄마를 공유해”라고 하곤 했죠. 하하.
◇‘날 더 닮으면 어쩌나’ 걱정한 엄마
얼마 전 이사하면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요! 엄마, 아빠가 쓴 제 육아일기요. 세상에! 엄마는 제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돼서 미국 공연을 했더라고요. 생후 5개월 땐 저도 TV에 출연한 거 아세요? KBS ‘빅쇼’에서 엄마가 ‘라이브의 여왕’(영상 보기) 편 공연을 했는데 그때 제가 보행기를 타고 아빠랑 할머니, 이모할머니와 함께 무대에 올라간 거예요. 육아일기에 ‘세인이 첫 TV 출연’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빅쇼’에서 엄마가 저 임신했을 때 고민 얘기한 거요? 저도 알아요. 엄마가 “남들은 아이 가지면, 제발 손가락 발가락 온전히 달려 나오길 기도한다는데 저는 거기다가 피부색은 어떨지, 머리카락은 (곱슬머리가 아니라) 펴져서 나올지, 두 눈의 눈동자 색은 같을지 하는 것까지 고민됐다”고 했었죠.
그때 엄마의 심정을 온전히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어요. 제가 유치원 과정부터 서울국제학교에 다닌 게 그래서죠. 저를 낳고 보니 아빠를 많이 닮아서 안심이 되면서도 ‘자라면서 점점 외국인처럼 외모가 변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시더래요. 그럴 경우 혹시라도 (엄마처럼) 제가 차별을 당할까 봐 외국인 학교에 보내신 거죠.
맞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 유엔에서 인턴을 했고,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 후에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들어간 이력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한 건 아니에요. 그야말로 ‘노력형’이었어요.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죠. 6학년 때 전교 1등인 친구랑 같은 반이 됐는데 ‘나도 쟤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엄마는 늘 바빴으니까 학원이며 과외 스케줄 짜는 것도 다 제가 알아서 했죠. 그 무렵인 것 같아요, 주체적으로 살게 된 게.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냐고요? 돌이켜 보니까, 엄마, 아빠를 보며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아요. 특히 엄마를 보면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게 됐거든요. 엄마는 한번에 ‘빵’하고 뜬 가수가 아니에요. 크고 작은 실패들이 만든 성공, 그 시간이 만든 결과죠. 저도 그래서 껍데기만 화려한 삶은 살지 말자는 게 모토예요.
◇사춘기와 갱년기가 부딪히면
엄마를 어떻게 처음부터 그렇게 이해했겠어요.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 또 여느 모녀처럼 엄마와 여러 ‘다이내믹’(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엄마의 삶을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거죠.
사춘기 때요? 아우, 말도 마세요. 저와 엄마도 사이가 심각했어요. 저를 늦게 낳아서 엄마는 그때가 또 갱년기였던 거예요. 상상해보세요, 사춘기 딸과 갱년기의 엄마! 살얼음판이죠. 무슨 사건이 있었냐고요? 잘 기억도 안 나요. 하하. 아마 제가 무심코 퉁명스럽게 한 말에 엄마가 “말 좀 따뜻하게 하면 안 돼?”하면서 언성을 높여 심각하게 싸운 것 같아요. 아주 많이 힘들었다는 것만 또렷하게 기억 나요. 엄마랑 싸운 게 처음이었거든요.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죠.
그래도 그런 시기가 없었으면, 엄마와 감정의 골이 깊어졌을 것 같아서 차라리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들 같은 딸이라 엄마는 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살갑게 얘기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더구나 저는 어릴 때부터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한 터라 엄마가 뭘 물어도 ‘잘 모를 거야’하는 식이었죠.
그러다 ‘정말 이 세상에 엄마, 아빠밖에 없구나. 그런 내 편이 있어서 참 좋다’라고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제가 아팠거든요. 뭔가 이상하다고 처음 느낀 건 고3 때였어요. 식이장애가 생긴 거죠. 쉽게 말하면, 폭식증이에요.
폭식증이라고 하면 보통 ‘많이 먹는 병’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좀 달라요. 예를 들면, 고구마를 3개만 먹으려고 했는데 1개를 더 먹었다고 쳐요. 그런데 그 1개를 먹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는 거예요. 운동을 과하게 한다든지, 구토를 한다든지 해서요. 양이 문제가 아니죠.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데서 오는 일종의 강박증이에요.
◇퍼주는 것 아닌 지켜봐 준 사랑
그러다 대학에 가서 사달이 났어요. 2학년 전체 학기가 끝나기 2주 전이었죠. 기숙사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과호흡이 되면서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간의 폭식증과는 다른 차원의 증상이었어요.
곧장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엄마에게 전화했어요. 한국에 가야겠다고. 엄마도 뭔가 감을 잡았겠죠. 한국에 와서 엄마에게 상태를 설명하고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엄마가 당장 관련 분야의 의사를 수소문해줬어요.
석 달 동안 치료받고 책 읽고 먹고 자면서 보냈어요. 나에게 온전히 집중한 시간이었죠. 살면서 그렇게 쉬어본 게 처음이더라고요.
그때 제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그간에 나는 깡통 같은 사람이었더라고요. 속은 채워지지 않은 채 겉만 예뻤던 거예요. 그 시간으로 비로소 내 속이 채워진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그 기간에 ‘아,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하는 걸 느꼈어요. 내가 원하는 사랑을 처음으로 받은 게 그때인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어. 엄마가 알아주면 좋겠어’ 싶었을 때 엄마가 그걸 인지했고, 제 상태를 인정해줬고, 내 바람을 들어줬거든요. 어쩌면 엄마, 아빠가 평생 제게 준 사랑에 비하면 정말 작디 작은 부분인데 그 하나가 저를 채워준 거예요.
그렇다고 뭐 대단히 특별한 걸 해주신 게 아니에요. 그냥 저를 가만히 지켜봐 달라 부탁했고 엄마는 그렇게 해줬어요. 그때는 평소 엄마의 퍼붓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내 상태를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사랑이 필요했던 거죠.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받은 이해가 저를 살린 거예요. 그때 엄마에게 정말 고마웠어요.
석 달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 엄마가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건강이 중요해”라고 하는데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아마 늘 제게 했던 인사일 텐데 그 전까지는 마음에 별로 와 닿지 않았거든요.
◇공황발작으로 달라진 삶
미국에 돌아간 뒤 대학생활요? 모든 게 달라졌죠. 그 전까지는 내 사전에 결석이란 없는 출석률 100%의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일단 제 상태를 모든 교수에게 설명하고 건강 문제로 출석할 수 없을 땐 억지로 가지 않았어요. 출석 대신 학점을 딸 수 있는 방법이나 보충 수업을 택했죠.
이전엔 강박이 생길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그 대신 캠퍼스를 30분씩 걷는 걸로 방법을 바꿨어요. 식사도 위가 80% 정도 찰 때까지 먹는 연습을 했죠. 그걸 느끼려면 정말 천천히 먹어야 해요. 그렇게 느리게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더라고요! 그 이전까지는 목표를 향해 앞도, 뒤도, 옆도 안 보고 돌진하는 삶이었지만, 그때부터는 ‘어떻게’가 중요해진 거죠. 졸업할 때 제가 학과(과학, 기술과 사회) 수석이었는데 성적만 치면 2등이었어요. 그런데 학과 외에 창업이나 마케팅 동아리 같은 다양한 활동을 한 덕분에 수석 졸업을 한 거죠.
MS에 합격했을 때 엄마 반응요? 정말, 무진장 좋아하시더라고요. 졸업도 하기 전에 인턴으로 합격해서 정직원이 됐거든요. 싱가포르에 있는 아시아 헤드쿼터에서 근무를 했는데 일도 재미있고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도 많았어요.
그런데 그때 정말 해보고 싶은 스타트업 아이디어가 생긴 거예요. 퇴근하고 나서는 창업 준비를 했죠. 인턴 생활까지 MS에서 일한 지 10개월 만에 그만두기로 결심했어요. 한국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했죠.
◇‘하지 마’ 소리 안 했던 엄마
그때는 엄마가 뭐라고 했냐고요? 지금까지 살면서 엄마한테 감사한 것 중에 하나는 단 한번도 ‘하지 말라’는 말을 안 하신 거예요. 아마 속으로는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엄마는 절 믿고 해보라고 하셨죠. 그렇게 만든 회사가 ‘넉 아웃’이에요. 운동과 마인드 트레이닝뿐 아니라 취미 생활까지 돕는 멤버십 ‘부티크 짐’이었죠.
미래가 어둡지 않은 분야였어요. 그런데 창업을 하니까 내가 또 밤낮없이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웰니스’를 전파하는 회사인데 정작 저는 ‘웰니스’가 없는 삶이었던 거죠. 점점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고 결국 쉼을 택했어요. 엄마는 저보다 제 상태를 더 빨리 알고 있었는지 몰라요. 사업을 접어야겠다고 했을 때 정말 잘했다고 해줬으니까요. 잠시 휴식 기간을 거쳐서 지금은 글로벌 마케팅회사(거쉬클라우드 그룹)에서 콘텐츠 마케터로 일하고 있어요.
‘인순이의 딸’로 불리는 게 어떠냐고요? 그게 저인 걸요. 부담스럽고 싫은 때도 있죠. 특히 창업을 했을 때 내 노력이 아니라 내 이름 앞의 수식어가 더 빛을 발해서 순수하게 보지 않는 시선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내 인생의 일부예요.
◇엄마의 행복한 목소리가 내게 주는 것
어릴 때 엄마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아이들의 영혼이 세상을 떠다니다가 누군가의 배를 찾아 들어가서 엄마와 자식의 연이 맺어지는 거라고요. 그 말대로라면 저는 정말 엄마를 아주 잘 찾아 들어간 거죠.
특히 엄마에게 가장 감사한 건 늘 저한테만은 한결 같은 행복한 목소리로 불러주고 말해주는 거예요. (밝고 높은 톤으로) “세인아, 공주~”라고 하시죠. 살아보니까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인 걸 알겠어요.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아요. 심지어 엄마가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부정적인 사건에 휩싸였을 때도 제게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갔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엄마를 떠올리면 저는 ‘천하무적의 히어로’가 떠올라요. 그런 존재가 제 뒤에서 늘 저를 지키고 보살피고 있는 거죠! 미래에 태어날 내 아이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미안해져요. 난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엄마한테 요즘 가장 바라는 건 건강밖에 없어요. 내가 아팠던 그때, 엄마가 저한테 당부한 그 말처럼요.
▶엄마의 마음은… ‘[인터뷰-엄마] 가수 인순이 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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