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동일본대지진 10년] 후쿠시마 지역 현지 풍경
귀환곤란구역서 해제 후타바, 나미에 마을 가보니...
여전히 방사능 위험지대 수두룩
쇼핑센터는 주민없는 건설노동자뿐재일교포 유미리 작가 북카페 운영 희망도 싹터
“500여 가구 넘던 이웃 주민들 중 돌아온 사람은 10명 정도 됩니다. 일본 정부가 ‘부흥(復興)’이란 표현을 함부로 말하는 게 싫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 70km 해저에서 규모 9.0의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난 5일 후쿠시마현 후타바군(雙葉郡) 나미에마을(浪江町)에서 곤노 스미오(56)씨의 집터를 찾았다. 곤노 씨는 정부 측이 현실을 무시하고 너무 일찍 피난지역에서 해제시켰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고향에 돌아와 시험 삼아 농사를 지어보려 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 집들이 사람이 살지 않아 버려져 있거나 허물어져 공터가 돼버렸다. 버려진 넓은 농지는 지역당국에서 조성한 ‘태양광 패널 밭’이 돼 있었다. 원전사고 이후 이바라키현을 시작, 이곳저곳으로 피난 다니던 그는 지금 재해공영주택에 살고 있다.
귀환곤란구역서 해제됐지만 와보니 방사능 위험 천지
후쿠시마 주민들은 피해는 잊혀지고 ‘부흥’의 구호만 요란한 것을 원치 않았다. 현지에서 만난 이들 중 '후쿠시마의 부흥을 세계에 발신'한다는 도쿄올림픽 구호에 공감하는 사람은 적었다. 사고 전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했던 곤노씨는 나미에 마을이 ‘피난지역’(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 20㎞)에서 너무 일찍 해제됐다며,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기준치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고 털어놓았다. “지자체 공무원에 항의하니 ‘그 지역은 깨끗하게 제염(토양오염 제거)됐다고 들었다’는 대답만 돌아왔죠. 결국 집에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작년 여름 집을 허물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흥해 다시 일어서겠습니까.”
인근 후타바 마을을 둘러보니 작은 소방서에 걸린 시계가 2시 48분에 멈춰 있었다.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쓰러진 의자 주변에 가재도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대지진 당시의 아비규환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다.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을 ‘후쿠시마 부흥’과 연결시키며 오는 25일 시작되는 성화 봉송 첫날에 이 마을들을 포함한 원전 인근을 성화 봉송로에 포함시켰다. 지난해 3월 초, 너무 이르다는 비판에도 일부 ‘귀환곤란구역’을 해제하고 동쪽 해안을 가로지르는 JR조반선(도쿄 닛포리~미야기현 이와누마) 모든 역을 개통한 것도 올림픽 때문이란 추측이 나왔다.
1923년 설립돼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후쿠시마현립후타바고교는 잡초만 무성했다. 폐쇄된 교실 창문엔 ‘전국고교유도선수권대회 출장 헤이세이23년(2011년) 5월’이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모든 풍경이 시간이 멈춘 영화세트장 같았다.
기자가 방사능량 직접 측정하니 도쿄의 50배 넘어
후타바 마을은 후쿠시마현 내에서도 가장 늦게 작년 4월 4일 0시를 기해 ‘귀환곤란구역’에서 해제된 곳이다. 도로 곳곳엔 여전히 “귀환곤란구역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구역을 통과하는 도로는 제염이 돼 있지만 차량 밖으로 나올 순 없다. 마을 내 도쿄전력 소속 원전 노동자들이 살던 기숙사 근처로 차를 몰았다. 기자가 차로 가까이 접근하자 측정기의 경고음이 “삑삑”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귀환곤란구역 해제’란 정부 지침이 무색하게 높은 방사선량이 검출되는 현장이었다. 기자가 직접 측정하자 시간당 최고 2.7μSv가 나왔다. 일본 정부의 장기 제염목표이자 일반인에게 권고되는 연간 피폭한도를 환산한 수치인 시간당 0.23μSv를 훌쩍 뛰어넘는 결과다. 평소 0.05μSv 미만인 도쿄 등 수도권과는 비교도 안 된다. 제염 후 모은 오염토를 쌓아 놓은 중간저장시설이 이곳에서 수백m 옆에 있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했다.
두 마을보다 상대적으로 좀더 일찍 피난지역에서 해제된 도미오카 마을은 겉보기엔 10년 전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래된 건물이나 무너진 건물을 싹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이 다수 들어서 막 탄생한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겉모습을 바꾼다고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대신 무인운영 시설들로 채워졌다. 도미오카 마을 기차역은 깨끗했지만 사람이 없는 ‘유령시설’로 느껴졌다.
서둘러 인파가 가장 많이 모인다는 ‘사쿠라몰 도미오카’란 쇼핑센터로 이동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푸드코트, 드럭스토어, 건설자재ㆍ공구상이 모여 있다. 다행히 평일 점심시간이라 주차장에 차가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내부에 들어가니 정작 주민보다 작업복을 입은 건설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과거의 주민들이 고향에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만 짓고 있는 셈이다.
"함께 살아 내자" 희망의 싹 틔우는 이들도...재일동포 유미리 작가
물론 후쿠시마현 해안 지역이 모두 이렇지는 않다. 조금씩 희망의 싹을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 정부가 선전하는 ‘부흥’보다는 주민들끼리 어려움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려는 움직임이 이이타테 마을 동쪽, 나미에 마을 북쪽의 미나미소마(南相馬)시에서 확인됐다.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씨가 원전에서 7㎞ 떨어진 미나미소마시 오다카구에 2018년 오픈한 북카페 ‘풀하우스’를 가보니,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달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최근 전미도서상 수상 후 바빠진 유씨 대신 15년간 유씨와 함께한 무라카미 도모하루 부점장은 “유씨는 가족과 함께 가마쿠라시에 살았으나 대지진 후 이재민을 위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며 600여명의 사람들을 만났다”며 “이후 이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해 2015년 이주했다”고 근황을 전했다. 멀리서 ‘힘내자’는 응원만으론 공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북카페는 혼자 사는 고령자 등 주민들이 소통하는 ‘사랑방’이 됐다. 후쿠시마의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 힘이 되는 귀한 장소가 된 것이다. 무라카미씨는 “일주일에 잠깐이라도 나오는 주민이 100명 정도”라며 “센다이나 도쿄 같은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이 절반”이라고 전했다.
풀하우스에 고령층이 많다면, 같은 지역의 ‘오다카 파이오니어 빌리지’는 젊은이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 출신의 창립자가 피난 후 귀환해 설립한 코워킹 스페이스로, 후쿠시마의 미래가 싹트는 요람으로 느껴졌다. 이곳에서 일하는 와타나베 나오히로씨는 “게스트하우스 같은 숙소가 함께 있어 재택근무를 하는 젊은이나 창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며 “이곳 주민과 새롭게 온 젊은이들이 함께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풀하우스에서 만난 손님인 ‘요리미치문고’ 공동대표는 “야마가타현에 사는데 이곳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지인의 권유로 왔다”면서 “내가 사는 곳에선 후쿠시마나 원전 이야기가 TV에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곳에 와보니 실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안과 밖의 세계는 이렇게 달랐다. 외부에선 10년 전의 사고를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고 싶겠지만, 주민들은 그 교훈을 기억해주길 가장 원하고 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