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로나(김현수)한테 무조건 이겨. 죽여서라도 이겨."
천서진(김소연)은 자신의 딸 하은별(최예빈)을 벼랑 끝으로 몬다. 목표는 교내 예술제 대상 트로피. 은별은 로나를 이길 수 없게 되자 죽이고 만다. 도망가는 로나를 기어코 뒤쫓아가 트로피를 휘두른다. 은별의 하얀 드레스 위로 로나의 붉은 피가 튄다.
왕따 당하는 로나를 도운 '괘씸죄'로 유제니(진지희) 역시 집단 괴롭힘 대상이 된다. 반 친구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음식물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우겨 넣고, 콜라 1ℓ를 단숨에 마시도록 강요당한다. 그런 제니를 친구들은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낄낄댄다.
'주의' 받고도... 아랑곳 않는 SBS '펜트하우스'
이는 모두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속 청아예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폭력과 협박을 일삼고 심지어 살인까지 벌이는 이들은 고3인 청소년이다. '펜트하우스'는 중학생들의 집단폭행 장면 등으로 지난 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서 법정제재인 '주의'를 받았지만, 이달 19일 시작한 시즌2에서도 학교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변함이 없다. 최근 학교폭력 논란이 방송계를 덮친 가운데서도 '펜트하우스'만 홀로 비껴난 모양새다. 주요 갈등을 유발하는 소재로 청소년의 학교폭력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걸까. 드라마에서 학교폭력에 대한 지나치게 자세하고 가학적인 묘사가 꼭 필요한 걸까.
SBS 관계자는 법정제재 의결에 앞서 지난해 12월 열린 방심위 방송심의소위원회에서 "'펜트하우스'는 부모의 잘못된 가치관이 자녀들에게 물려졌을 때 어떤 파국을 맞게 되는지, 그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될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며 "스토리 맥락상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밝혔다. 중학생들이 과외교사로 속인 동갑내기 한 명을 폐차장으로 납치해 뺨을 때리고, 술을 뿌리고, 불 지르고, 감금하는 등 폭력 묘사가 지나치다는 시청자 232명이 방심위에 제기한 민원에 대한 SBS 측 변이었다.
'더 세게'... 시청률만 잘 나오면?
드라마 속 학교폭력 묘사가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하지만 그 폐해는 만만치 않다. 우선 모방 범죄를 부를 우려가 크다. 미성숙한 청소년에게는 폭력을 행하게 될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미디어 속 폭력 장면이 무의식 중 잔상으로 남아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재현될 위험이 크다고 지적한다. 가치관 정립이 되지 않은 경우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폭력에 무뎌지는 것도 큰 문제다. 특히 '펜트하우스'는 폭력의 강도와 범위를 무한정 확장하고 있다.
학교폭력을 다루는 안일한 방식 역시 문제적이다. 극의 긴장과 몰입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함부로 사용되고 있다. 그 수위는 더 자극적이고, 더 선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된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훗날 이들이 가할 보복과 그것에 따른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학교폭력 장면이 전시(이소영 방심위원)"되고 있는 것이다. "방송사의 안일함과 미필적 고의에 가까운 의도가 강하게 의심"될 정도다. 강진숙 방심위원은 "폭력성을 시청률의 소재나 상업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도구화하는 것은 지양돼야 한다"고 방송사의 행태를 꼬집었다.
청소년과 학교폭력, 상투적 묘사는 이제 그만
청소년과 학교폭력을 획일적이고 상투적으로 그리는 드라마 관습에도 이젠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질풍노도 시기인 청소년의 흔들리는 한쪽 면을 조명하는 게 소재적 측면에서도 흥미롭고, 흥행적 측면서도 자극적이니 눈길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인간의 악한 모습을 주로 보여주는 장르물이 많아지면서 청소년과 학교폭력 묘사도 더 자극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교폭력을 현실적이면서 섬세하게 그려낸 과거 청소년 드라마 '학교' 시리즈나 발랄 경쾌한 코드의 드라마 등처럼 청소년의 다양한 일상과 고민이 보다 다채롭게 그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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