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우리가 하나라고 믿는 신의 집은 셋으로 나뉘어 있나니, 이 세상에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있도다. 이들 셋은 하나로 뭉쳐 있나니 서로 떨어져 있지 못하리라.”
10세기 랭스의 대주교였던 아달베롱(Adalberon)이 로베르 왕에게 올린 시(Poemes au roi Robert)다. 이 글은 중세를 설명할 때 여러 책에서 인용할 정도로 유명하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아달베롱이 언급한 세 부류의 사람은 성직자, 기사, 농민이다.
중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역사 이래 가장 컸던 시기다. 인용한 시에서 기사나 농민보다 성직자가 가장 먼저 언급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직자는 기사이기도 했던 왕과 영주의 보호를 받았지만, 때로는 그들과 권력 다툼도 벌인 특별한 계층이다.
일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십일조를 바치고 부역을 해야 했다. 물론 그들은 싸우는 사람을 위해서도 일해야 했으며 세금을 바쳐야 했다. 내세의 천국을 위해, 현세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세 부류의 사람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이 중세 초기 와인의 역사에 중요한 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두 부류가 있다. 교계에 속한 성직자와,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장과 수도자(수사와 수녀)이다.
이들 기도하는 사람들, 즉 성직자와 수도자가 중세 초기 와인의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당시 교회와 수도원은 왕과 영주들 못지않은 대토지를 소유했는데, 그곳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했다.
중세 초기의 유럽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특혜를 받아 교회의 힘이 세진 것도 잠시,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교회 역시 혼란에 휩싸였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영주의 보호 아래 들어가 장원에서 생활했다. 교회 역시 패권을 잡은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에게 세례를 주고, 페피누스 3세의 쿠데타를 용인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등 권력자들과 결탁해 그들의 안전망으로 들어갔다. 그 대가로 교회는 농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십일조를 걷었고,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할 수 있었다.
교회가 권력자들과 손을 잡자 교회에 토지를 하사하거나 기부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교회는 점점 부유해졌다. 그런데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교회는 어느새 세속화됐다. 어느 단체나 ‘지분’이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크듯 왕과 영주는 교회의 재산에 간여했고 자신들의 측근을 주교로 임명했다. 이런 주교들은 세속인과 똑같이 결혼해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재산은 물론 성직까지 상속했다. 성직을 사고파는 것도 예사였다.
당시에는 교회 소유의 땅뿐만이 아니라 주교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땅도 많았다. 특히 주교들은 포도밭을 많이 소유했다. 6세기 낭트의 펠릭스 주교는 루아르 인근에 포도밭이 있었다. 다른 주교들 역시 자신들이 소유한 포도밭 근처로 거처를 옮길 정도였다. 오늘날까지도 포도밭으로 유명한 낭트, 투르, 오를레앙, 랭스, 카오르, 랑그르, 메츠, 트리어 등지가 당시 주교들이 거처하던 곳들이다. 주교들이 포도밭을 늘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와인이 성찬례와 같은 예배 의식에 꼭 필요해서였을까.
주교들 말고도 중세 와인 발전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 이들이 수도원 수도자들이다. 이들은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외딴곳에 수도원을 지어 공동생활을 하며 베네딕토 규칙서를 지키며 살았다. 청빈, 정주, 복종을 맹세한 이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하고 노동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다 보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학자, 농부, 양조가, 수공예 장인, 약사, 의사이기도 했다. 또한 수도자들은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지식인인 터라, 이들 덕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고전들이 보존되었고 농업과 와인 양조법 등 각종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한편 수도자들은 땀 흘려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특히 와인을 만드는 일은 성경을 필사하는 것만큼이나 영성을 키우는 숭고한 일로 여겼다. 와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기에 그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은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실험하는 등 과학적으로 포도 농사를 지었다.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레드와인엔 달걀흰자를, 화이트와인에는 물고기 부레를 사용하면 와인을 맑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터득했다. 또한 맛이 변한 와인은 식초로, 등외품 포도로는 햄이나 치즈를 절일 때 활용했고 포도씨 기름으로는 비누나 향신료를 만들었다. 이 모든 노하우를 이들은 소작인들에게 전수했다.
이처럼 소임을 다하는 영성 가득한 수도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수도원장은 당시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영주와 이해관계에 얽힌 이가 임명되면서 성 문제나 재산 문제가 불거졌다. 이때 개혁을 부르짖으며 생겨난 곳이 클뤼니 수도원이다.
910년경에 기욤 1세(아키텐 공작이자 마콩 백작)가 프랑스 부르고뉴 클뤼니에 땅을 기증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이들은 초기의 베네딕토 규칙서를 지키면서 수도원뿐만 아니라 교회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직자들은 결혼도 세습도 성직 매매도 하지 말라. 수도원도 영주의 봉토를 받아선 안 되며, 영주 역시 수도원에 간여하지 말라. 수도원장은 수도자들의 회의에서 선출한다.”
클뤼니 수도원은 영주의 봉토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기증한 재산은 받았다. 당시 영주들 사이에서는 수도원에 땅을 기증하거나 유산을 남기면서 노후를 의탁하는 것이 유행했다. 점차 수도원이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자 수도자들은 더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소작인들이 수도자들이 먹고 마실 음식과 와인을 책임졌다. 결국 클뤼니 수도원 역시 개혁의 대상으로 변질했다.
또다시 울려 퍼지는 개혁의 외침 속에 1098년 부르고뉴에 시토 수도원이 설립됐다. 이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직접 노동하면서 포도나무 재배법 등 여러 농사법과 와인 양조법을 발전시켰고, 농민들에게 이를 전수했다. 부르고뉴의 클로 드 부조와 독일 라인가우의 하텐하임과 자알레운스트루트, 오스트리아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캄프탈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시토 수도회에서 개척한 대표적인 와인이다. 안타깝게도 시토 수도회 역시 나중에는 개혁의 대상이 될 정도로 타락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교회나 수도원이 이토록 포도밭을 넓혀 와인을 만들어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와인이 성찬례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실상은 다르다. 중세에는 일반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하더라도 영성체(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일)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영성체를 한다 해도 사제만 빵과 와인을 먹고 일반 신도들은 빵만 받아먹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종교적 목적에 필요한 와인은 극히 소량이었으리라.
오히려 와인은 세속적으로 더 많이 필요했다. 교계 고위급 인사들과 교회에 영향력이 큰 관계자들은 종교적 이유와는 상관없이 매일 와인을 마셨다. 연회도 자주 열었으니, 이 자리에 와인은 필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와인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성직자들 모습이 숱하게 등장한다. 한 주교는 매일 와인을 마시고 취해서 장정 4명이 들어서 옮겨야 했다. 또 어떤 주교는 알코올에 중독되어 가두어야 할 정도였다. 와인이 없다며 기물을 부수고 행패를 부리는 주교도 있었다.
성직자라는 주교들이 이 지경인 걸 보면, 마인츠의 지크프리트 대주교의 일화가 이해될 정도다. 그는 자신의 포도밭과 거처가 있는 뤼데스하임 근처의 농부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에게 그 황무지는 장차 와인을 공급할 포도밭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초기 와인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세속적 생활에 빠진 이런 주교들 ‘덕분’이기도 했다.
수도원장의 ‘공’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역시 주교들 못지않았다. 매일 와인을 마시며 연회를 열었다. 수도원장들은 서로 와인을 교환하면서 자기 수도원 와인이 품질이 좋다며 뽐내기도 했다. 이들이 즐긴 ‘뱅 도뇌르’라는 칵테일 파티는 모습은 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내려올 정도다.
수도자들에게도 와인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과 떨어져 외딴곳에서 규칙적인 수도 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와인은 삶의 윤활유이자 숨통이었을 것이다. 당시 수도회, 특히 베네딕토 수도회는 수도자들에게 매일 일정량의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원칙을 정했다.
“와인은 수도자들과는 맞지 않는다. 허나 모두가 와인을 마시기를 원하니 하루 1헤르미나(약 0.23리터)씩의 와인을 허용한다. 특별히 몸이 아픈 수도자에게는 수도원장의 재량으로 더 많은 와인을 제공할 수 있다.”
한편 와인은 수도원 살림에도 필요했다. 수도원은 세금을 면제받기는 했지만, 자급자족하려면 여분의 와인을 내다 팔아야 했다. 당시에는 와인이 현금화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농산물이었다. 수도원은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소작료와 세금뿐 아니라 십일조를 와인으로 받기를 원했다. 수도원이 소작인들에게 포도 재배법을 가르치고 와인 생산을 권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손님은 으레 와인 대접을 받았다. 당시에는 순례자 대부분이 수도원에 머물렀으니, 성지 순례가 유행하면서부터는 와인도 많이 필요했으리라. 사실 순례자가 많이 찾아오면 수도원과 교회는 물론, 마을 전체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순례자가 좋아할 만한 성 유물을 훔쳐 오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순례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수도원은 좋은 와인을 만들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중세의 교회와 수도원은 ‘본의 아니게’ 와인의 명맥을 지켜 후대에 물려주었다. 교회와 수도원이 생기는 곳에는 어김없이 포도밭이 생겼고 와인을 생산했으니 말이다. 물론 당시 영주들 역시 교회와 수도원 못지않게 포도밭을 경영하며 와인을 생산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당시 ‘나그네’들은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보며 가슴이 애달프기는 했을까? 교회와 수도원의 포도밭 위로 타는 저녁놀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사람’의 속처럼 붉었을 테니 말이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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