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야기는 만나서 하시죠. 화상 회의 중이었다.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해 감정이 점점 격앙되고 있었다. 논의가 공전되어 다들 지쳐갈 때 화면 저편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 이야기는 만나서 하시죠.
처음에는 발끈했다. 만나서 하자고? 아니 화면 속의 얼굴들은 허상인가? 우리가 유령이야?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 이런 건 만나서 이야기해야지. 이제는 ‘뉴노멀’이 된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일까 아닐까? 모니터 안 수많은 사각형 액자 속의 사람들은 정말로 나를 만났다고 생각할까? 이쯤에서 자꾸 노래 가사 하나가 떠오른다. 만날 수 없잖아. 느낌이 중요해. 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다. 가장 공적이지만 또 한편 가장 은밀한 장소. 아 이상한 장소는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공적인 동시에 은밀한 장소란 바로 교실이다.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는 곳.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 교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교실은 텅 비어 있어 더 이상 소용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실은 이제 죽은 것 같다. 아니, 당장은 연명하겠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사망 선고를 받을 것 같다. 우리 교육의 미래에 교실은 없다.
겉으로 보기에 교실의 기능을 정지시킨 것은 재난이다. 그리고 그 재난은 교실을 화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교실을 화면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가능했다며 어떤 이들은 경탄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동안 편안한 환경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 뒤늦음을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정부와 대학은 화면이 교실인 비대면 교육이 우리 교육의 미래라는 복음을 노골적으로 전한다. 교육 관련 학회에서는 비대면 교육에 사용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논의로 가득하다. 모두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비대면 교육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첨단 기술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 복음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 집 초등학생도 1년간의 수업을 무사히 완수했으니까. 물론 아이가 교육 동영상을 3배속으로 틀어 놓고 게임 유튜브 영상을 시청했다는 건 비밀이다. 어쩌다 학교에 가도 시험만 쳤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는 것도 비밀로 하자. 교우 관계가 끊어지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라는 말 대신 ‘어떤 유튜버가 그러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것도 말하지 않겠다. 부모의 입장에서 지난 1년간 아이가 받은 K교육의 핵심 원리가 ‘했다 치고’와 ‘너희들이 알아서 해’로 느껴졌다는 사실은 무덤까지 안고 가려 한다.
교육 현장의 주체들은 지난 1년간의 비대면 교육이 실패였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비대면 교육이 대면 교육의 보완재는 될 수 있지만 대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대체재가 되었다면 왜 대학생들이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겠는가?) 왜 비대면 교육은 대면 교육의 대체재가 될 수 없냐고? 가르침과 배움이란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몸을 통과해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언어학에서는 이를 실행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학습이란 추상적인 지식의 묶음을 전달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와 상호 개입, 즉 실행을 통해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실행공동체는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게 된다.
교실은 이러한 참여와 상호 개입의 장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몸이 함께 있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쉽게 무시하거나 지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느낌, 이 느낌들은 몸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런 느낌들은 학습의 토대가 된다. 화상 회의 도구를 통해 우리는 화면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지만, 우리의 몸이 같은 공간에 함께한다는 느낌, 우리가 학습 공동체라는 느낌은 주지 못한다. 이 느낌이 중요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시간 온라인 대면 수업이 시작되던 초기, 침대에 누워 수업을 듣는 학생이 있었다.(내가 이름을 부르자 벌떡 일어났다.) 맥주처럼 보이는 음료수를 마시는 학생도 본 적 있었다.(설마 내가 헛것을 본 거겠지.) 그 학생들도 화면 속에서 나와 다른 학생들 얼굴을 봤겠지만 자신들을 학습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 그들의 몸은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학생들은 나름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자’던 화상 회의 참여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게 아니다. 우리는 만나고 있었지만 사실 만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온라인 대학 교육의 모범 사례로 호명되는 미네르바 스쿨의 성공 공식도 ‘몸의 부재’를 극복하고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기’에 있다. 미네르바 스쿨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했기 때문에, AI를 활용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한다. 소수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수업에서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교수의 피드백이 주어진다. 미네르바 스쿨은 이렇게 공동체를 만들고 학생들을 그 공동체 안에서 성장시킨다.
공동체의 부재는 대학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처럼 매달리고 있는 온라인 대중 강의(MOOC)가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다며 교육의 미래처럼 포장되고 있지만 MOOC의 실제 수업 이수율은 극히 낮다.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된다는 말과 같다. 학습자들을 시청자로 만드는 MOOC의 사례는 아무리 수업 내용이 좋은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들, 어떤 AI가 등장한들 교육이란 결국 사람이 서로를 살펴야 하는 일, 사람의 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란 것을 보여준다.
어찌된 일인지 정부와 대학에 비대면 교육의 실패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실패를 성공으로 포장하면서 비대면 교육을 혁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믿기 힘든 소문도 모두가 소란스럽게 이야기하면 사실이 되는 법이다. 롤랑 바르트 식으로 말해보자. 지난 1년간 정부와 대학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 언택트라는 말,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실재하지도 않는 ‘비대면 교육의 성공’을 신화화했다. 더 나아가 ‘비대면 교육’을 우리 교육의 혁신이자 미래로 선언했다. 그리고 이 선언을 물리적 법칙처럼 자명한 이치이자 상식으로 만들었다. 바르트가 말하는 ‘자연화’다.
자명한 이치가 되었기 때문에 교육 당국과 대학의 구성원들은 비대면 교육이 과연 우리의 미래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자명한 이치에 의해 조종되는 마리오네트가 되었다. 마리오네트들이 질문하는 것을 잊자, 이윽고 재난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재난을 핑계로 정부는 비대면 강의에 대한 규제를 풀고, 대학은 이를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수단이 아닌 구조조정을 위한 기회로 삼고자 한다.
지난 1년 재난이 밀려든 교육 현장에서 교육 주체들은 처절하게 싸웠지만 처절하게 실패했다. 교육 현장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재난 자본주의이다. 교육은 작동하지 않고 있지만 재난 자본주의는 째깍째깍 잘 작동 중이다. 재난 자본주의는 재난으로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학생을, 선생을, 그리고 교실을 버리라 한다. 교실을 박제된 선생이 나오는 복제된 화면으로 바꾸라 한다. 그리고 그 화면에 무한대의 학생들을 집어넣으라 한다.
그러나 정답은 결국 교실에, 교실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에 있다. 사실 교실이든 화면이든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번을 만나도 공동체와 함께한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교육 주체들에게 그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교육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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