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병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소아과 전문의를 막 따고 공중보건의로 지방 병원에 근무할 때였다. 다운증후군인 아기가 태어났다. 다운증후군은 대부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부모에게 알려야 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염색체 검사 결과까지 확인하고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지능이 낮아 학습장애를 겪을 수 있고, 심장질환이 흔히 동반되고, 감염증에 잘 걸릴 수 있고… 친절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지키려고 노력하며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를 거의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다. 실력으로는 어딜 가든 빠지지 않는다고 기고만장해 있었다.
설명을 들은 엄마는 말없이 한참 흐느꼈다. 이런, 너무 자세히 알려준 것일까?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마음속으로 말을 고르는데,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이런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나요? 조금이라도 지능을 키워주려면, 조금이라도 다른 아이와 비슷하게 키우려면 어떻게 놀아주고, 어떤 책을 읽어줘야 하나요?"
가슴이 콱 막혔다.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얘기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지식과 경험의 일천함 이전에 환자를 질병이 아니라 인간으로 볼 준비가 안 돼 있었다는 뼈저린 자각과 반성이 밀려왔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관한 책을 찾았다. 국내에는 없었다. 인터넷이 미비한 시절이라 서양책은 검색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책이 있으면 의사에게도, 환자들에게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그 도시에 개원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개원의 생활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기러기 아빠 시절 여가선용 차원에서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서가 점점 쌓여가자 출판사 사람들이 책으로 낼 만한 주제가 없는지, 좋은 원서는 없는지 묻곤 했다. 말없이 흐느끼던 엄마의 모습, 장애 어린이를 키우는 실질적 방법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순간의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소아과 의사로서 번역가가 되었으니 내 손으로 그런 책을 내보면 어떨까?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정보가 될까? 다운증후군에 관한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삶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 장애가 생겼고, 그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엉겁결에 출판사를 시작했다. 낯선 일인 데다 캐나다로 삶의 터전을 옮긴 처지라 힘들었지만, 한 권씩 책이 나올 때마다 보람과 재미가 더해졌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을 무렵, 드디어 다운증후군 책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서양에는 장애 어린이를 키우는 법에 관한 책이 넘칠 정도로 많았다. 여러 권을 검토한 끝에 최종적으로 두 권 정도가 물망에 올랐다. 마침 한국에 들어간 김에 대학병원에서 발달장애를 보는 후배를 만나 말을 꺼냈다. "선배님, 그런 책을 내면 망합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다운증후군 아이가 거의 태어나지 않습니다. 산전검사에서 발견되면 바로 낙태를 시키거든요." 둔중한 뭔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 표정을 읽었던지 후배가 몹시 미안해하며 덧붙였다. “강남에서는 선천성 심기형 아이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은 늦었고 밖에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집까지 태워주겠다는 후배의 호의를 물리고 잠깐 걷기로 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비정하게만 보였다. 캐나다의 다운증후군 친구들이 떠올랐다. 항상 도서관 카펫 위에 주저앉아 책이나 음반을 고르는 친구, 지역사회에서 마련해준 커피 스탠드에서 사회복지사와 함께 커피와 머핀을 파는 친구들, 자원봉사자와 함께 어린이 풀에서 수영을 즐기는 친구들, 늘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녀 질투가 날 정도인 다운증후군 연인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이웃들... 지금도 한국에서 발달장애나 정신질환자에 관한 비참한 뉴스를 볼 때면, 자기 동네에 그들을 위한 시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악다구니가 들려올 때면, 그날 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합승을 외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를 가려고 그렇게 뛰는 것일까?
몇 년 전, 자폐에 대한 책을 번역한 후 몇 군데서 강연을 했다. 말을 마치고 질문을 받는데 한 엄마가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제 아이가 다운증후군입니다. 관련된 책을 내주실 수는 없을지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이런 분이 있었구나! 산전검사에서 다운증후군이 발견되면 낳지 않는 것은 비정한 일이지만,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우리처럼 경쟁적인 환경에서 지적장애가 확실한 아이를 낳아 기르기는 겁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예 산전검사를 하지 않거나, 알고도 낳는 분들이 있다. 너무나 존경스럽다. 그 힘든 여정에 충실한 지침서라도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제는 십여 년 전 다운증후군 부모지침서를 제안했을 때 거절했던 출판사들을 이해한다. 지금도 대다수 출판사가 생존이 어려운 형편이다. 승산이 전혀 없는 책을 낼 여력이 없다. 공공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출판사를 시작한 후 백방으로 알아보고, 민원도 내보았다. 대부분 화려한 건물을 짓거나 심지어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는 데는 돈을 아낌없이 쓰면서 책을 내고 사회적 지식을 축적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질문한 엄마에게 들려줄 말이 있었다. 그 문제를 오래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식 직거래'다. 다운증후군 육아지침서를 내는 데 1,000만 원이 든다면 10만 원을 낼 수 있는 사람을 100명 모으는 것이다. 출판사는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상태에서 책을 낼 수 있으니 망할 걱정이 없다. 독자 입장에서는 외식 한 번 할 돈으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관심이 없고 매번 독지가가 나서기도 어렵다. 그러니 당사자가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나는 길을 찾을 것이다. 그래야 의학의 길이 지식 추구와 치료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 그 아이와 엄마에게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까.
(하나 덧붙이자면 엊그제 21일은 '다운증후군의 날'이었다. 선천적으로 21번 염색체가 3개일때 생기는 질환이란 뜻에서 UN이 3월21일로 정했다고 한다. 다운증후군 가정이나 관련의료진이 아니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이런 날을 기억해준다면 장애가정에겐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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