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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좋아하든 말든" 소녀들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입력
2021.03.20 10: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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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넷플릭스 '걸스 오브 막시'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넷플릭스 ‘걸스 오브 막시’는 미국 10대들의 페미니즘 움직임을 다룬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16세 소녀 비비언은 교내 성차별 문제를 다룬 익명의 잡지 막시를 만들고, 성별, 인종, 성 정체성을 뛰어넘은 연대를 이끌어낸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걸스 오브 막시’는 미국 10대들의 페미니즘 움직임을 다룬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16세 소녀 비비언은 교내 성차별 문제를 다룬 익명의 잡지 막시를 만들고, 성별, 인종, 성 정체성을 뛰어넘은 연대를 이끌어낸다. 넷플릭스 제공


직업이 직업인지라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가 시작되면 공개되자마자 언론 반응을 살펴보는 습관이 있다. 한국 영화는 언론 시사 반응을 확인하고, 해외 작품은 공개 직후 영화 전문 매체에 올라온 리뷰 기사를 훑어본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3일 공개된 '걸스 오브 막시'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배우인 에이미 폴러가 영화감독으로 연출한 두 번째 작품으로 미국 10대들의 페미니즘 움직임을 다룬 작품이라는 소개에 기대가 컸다. 영화가 공개된 첫날, 미국의 한 매체는 이런 제목을 단 리뷰 기사를 올렸다. '페미니스트 관점을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세대에게 소개하는 에이미 폴러'. 읽어보니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납득 가능할 만한 비판이 포함된 글이었음에도, 제목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2021년을 사는 10대 청소년에게 페미니즘은 필요 없는 이야기일까? 혹은 '걸스 오브 막시'가 보여주고 있는 페미니즘은 이미 낡아버린 이야기일까? 답을 찾기 위해서, 영화를 봐야만 했다.


비비언의 평범한 일상은 루시(오른쪽)가 전학오면서부터 조금씩 균열이 난다. 넷플릭스 제공

비비언의 평범한 일상은 루시(오른쪽)가 전학오면서부터 조금씩 균열이 난다. 넷플릭스 제공


비비언(해들리 로빈슨)은 대학 진학을 위한 자기소개 에세이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가 가장 큰 고민인 고등학생이다. 자신과 비슷하게 조용한 성격을 가진 친구 클라우디아(로런 차이)와 함께 가벼운 수다를 나누고, 엄마 리사(에이미 폴러)와 장을 보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일어난 것은 루시(알리시아 파스콸페냐)가 전학을 오면서부터다. 루시는 전학 온 첫날부터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남성 풋볼 클럽 팀의 주장인 미첼(패트릭 슈워제네거)과 말싸움을 한 뒤, 미첼에게 부정적 의미의 관심을 받게 된다. 미첼이 루시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한 비비언은, 루시를 찾아가 미첼을 무시하라며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루시는 이렇게 대답한다. "조언해줘서 고마워. 근데 나는 앞으로도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닐 거야."

실은 비비언도 알고 있다. 미첼은 그냥 짜증 나는 남자애가 아니다. 위험하고, 위협적이다. 언제든 선을 넘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괴롭힐 수 있으며, 이미 그렇게 했다. 며칠 뒤 '최고의 엉덩이'와 같은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카테고리를 만들고 여학생들의 이름을 연결지은 리스트가 학생들 사이에 배포된다. 새로 생겨난 '가장 순종적인 (여성)'에는 비비언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날 밤 비비언은 "가부장제를 불살라 버리려는" 10대 시절을 보냈던 엄마가 모아둔 과거 자료들을 참고해서 학내의 성차별적인 분위기를 고발하는 얇은 잡지를 만들어 몰래 배포한다. 잡지의 이름은 '막시'. 잡지에 실린 여성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메시지, 남성 중심 문화에 대한 반격은 조금씩, 분명하게 학생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남학생 무리가 여학생을 품평한 리스트에서 ‘가장 순종적인 여자’로 뽑힌 비비언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넷플릭스 제공

남학생 무리가 여학생을 품평한 리스트에서 ‘가장 순종적인 여자’로 뽑힌 비비언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넷플릭스 제공


'걸스 오브 막시'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선명하다. 영화 속 학교, 오늘날의 세상은 남성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공간이다. 여성과 이를 지지하는 이들의 연대와 힘을 합쳐 내는 목소리만이 기존의 낡고 더러운 구조를 깨부술 수 있다. 감독인 에이미 폴러는 한순간도 이 메시지를 잊지 않는다. 이 메시지는 수줍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하던 소녀가 점점 목소리는 높여가는 변화로부터 TV에서 흘러나오는 여성들의 시위나 대기업의 여성 대표 수에 관련한 뉴스까지, 한 장면과 작은 소리 하나에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이 메시지가 특출나게 재미있거나 빼어나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 잘 녹여져있다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에이미 폴러는 자신이 믿고, 또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충실하게, 무엇보다 진지하게 전달하는 감독임을 '걸스 오브 막시'를 통해 증명한다.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 연출가로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믿는 더 나은 세계를 주인공인 비비언이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백인 남성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고, 성차별이 용인되고, 여성을 향한 집요한 괴롭힘과 혐오가 문화로 자리 잡고 있던 고등학교는, '막시 걸즈'의 목소리로 인해 변해간다. 더 나은 곳으로 바뀌어 간다. 여성의 목소리, 연대, 서로를 향한 믿음과 도움 덕분이다. 이 영화는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이며, 그랬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백인 남성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고, 성차별이 용인됐던 학교는 비비언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막시 걸즈’의 목소리로 인해 더 나은 곳으로 바뀌어 간다. 넷플릭스 제공

백인 남성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고, 성차별이 용인됐던 학교는 비비언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막시 걸즈’의 목소리로 인해 더 나은 곳으로 바뀌어 간다. 넷플릭스 제공


무엇보다 에이미 폴러가 만들고 싶은 세계는 모두가 다양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싸워야 하는 순간에는 힘을 합칠 수 있는 세계다. 비비언은 이 세계 속에서 성장한다. 친구 클라우디아를 통해서는 유색인종 2세대 이민자에게 같은 상황이 어떻게 다른 억압이 되는지를 알게 되고, 흑인이고 리더십이 있는 레즈비언인 루시를 통해 비비언과는 다른 인종, 다른 성격,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인물과 연대하고 친구가 되고 같이 목소리를 내는 경험을 얻게 된다. 미첼과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게 되는 키에라(시드니 박)는 여성의 성취가 남성의 성취에 비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며 동등한 권리와 대가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주는 인물이다. 비비언의 남자친구가 되는 세스(니코 히라가)는 믿음직한 지지자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비비언 외의 다른 인물들에게 깊이가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도구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걸스 오브 막시'의 세계와 이 영화 속 페미니즘이 지금의 10대들에게 필요 없다고 결론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영화 속 고등학교와 현실의 고등학교는 전혀 다를 것이다. 누군가 '소녀들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치고 손등에 하트나 별을 그리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자고 했을 때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 세계가 현실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걸스 오브 막시'의 메시지가 10대들에게 필요 없는 것이 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꿈 속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마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소녀가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 있게 되고, 고개 숙인 채 지나가기를 바랐던 시간을 넘어 고개를 빳빳하게 들게 되는 이야기는 필요하다. 10대 여성들에게도, 각기 다른 정도와 방식이었다 해도 분명한 차별과 혐오를 겪으며 10대 시절을 지나온 여성들에게도 모두 필요하다. 모든 일에 저항하고 싸웠던 젊은 날이 지나간 뒤 지난한 일상을 살며 이혼을 겪고 딸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년의 리사에게도, 리사를 연기한 할리우드의 유명인이지만 당연하게도 그 안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고충을 겪어왔을 에이미 폴러에게도. 나는 이 이야기가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걸스 오브 막시’를 연출한 에이미 폴러(가운데)는 극중 비비언의 엄마 리사로도 출연한다. 넷플릭스 제공

‘걸스 오브 막시’를 연출한 에이미 폴러(가운데)는 극중 비비언의 엄마 리사로도 출연한다. 넷플릭스 제공


'걸스 오브 막시'를 만든 에이미 폴러에 대한 일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료인 티나 페이가 전해준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작가로 일하던 시절, 대기실에서의 일이다. 지금은 자기 이름을 딴 유명한 쇼를 진행하는 방송인인 지미 팰런이 당시 프로그램의 간판스타였는데, "야하고 시끄럽고 '숙녀답지 못한'" 농담을 하는 에이미 폴러에게 팰런이 "그만해! 안 귀여워! 마음에 안 들어!"라고 외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 에이미 폴러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고 한다. "네가 좋아하든 말든 신경 안 써."

'걸스 오브 막시'는 에이미 폴러의 그런 일면을 닮은 영화다. 영화 속 어떤 순간을 귀엽고 유쾌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메시지와 주제에 대한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분명하다. 영화 안에서도 밖에서도 쉽게 웃어주지 않고 남자가 호감을 느끼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에이미 폴러처럼,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 거야"라는 대사처럼, 영화 속 노래 가사처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로 한 순간, 상관없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내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걸스 오브 막시'가 10대의 이야기인데도 왜 귀엽지 않냐고, 왜 사랑스럽지 않냐고, 그래서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필요하며, 당신이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윤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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