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5~8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와 테러 위협의 악재 속에서 2,000여 년 가톨릭 역사상 최초로 이라크를 방문했다. 교황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출생지로 추앙받는 이라크 남부의 우르에서 한 뿌리에서 나온 아브라함의 종교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공존과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오랜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모술도 방문하였다. 모술 인근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을 보낸 구약성서의 인물, 요나의 이야기가 펼쳐진 니느웨가 있다. 모술은 이슬람국가(ISIS)의 거점이 되면서 많은 기독교 유적지가 파괴되었고 수십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떠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교황은 ISIS와의 전쟁으로 파괴된 네 교회가 인접한 모술 광장에서 평화로운 공존의 시대가 열리길 기도했다. 이렇게 교황은 분쟁에 시달려온 이라크 땅에 평화의 순례자로서 분명한 자취를 남겼다.
그런데 중동의 정치적 상황은 평화의 메신저로서 교황의 발자국 위에 새로운 해석을 덧입히고 있다. 우선, 교황과 시아파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알리 알 시스타니 간의 만남을 살펴보자. 이라크의 무스타파 알 카디미 총리는 가톨릭 수장과 시아파 지도자 간의 역사적 만남이 성사된 3월 6일을 관용과 공존을 위한 국경일로 지정했다. 그만큼 교황과 알 시스타니의 회동은 최고의 이벤트가 되었다.
교황은 알 시스타니를 만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60㎞ 떨어진 시아파의 성지 나자프로 향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이맘 알리의 성묘가 있는 나자프는 오랜 역사 속에서 명망있는 종교 학자들이 몰려들어 배움의 전당을 형성해 왔다. 시아파 무슬림을 박해한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서 나자프의 명성은 위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나자프는 옛 명성을 회복해 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알 시스타니의 역할이 중요했다.
한편, 이란에는 나자프에 비견되는 시아파 종교 도시 콤이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호메이니는 콤을 시아파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나자프와 콤은 시아파의 요충지로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정통 교리의 해석 등을 둘러싸고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알 시스타니는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h)에 대해 다소 이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관계를 감안하며 일부에서는 교황의 나자프 방문에 대해 서구와 갈등관계를 갖고 있는 이란의 콤 대신 나자프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정치적 측면이 반영되었다는 관측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가 발행한 기념우표가 눈길을 끌었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는 교황의 초상화에 터키 동남부, 이란 서부, 키르쿠크 등이 포함된 가상의 쿠르디스탄 영토를 그려놓은 우표를 발행했다. 쿠르드 문제에 민감한 주변 국가들은 거센 항의에 나섰다. 터키 외무부는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가 허황된 야심을 드러냈다고 비판했고, 이란 외무부도 국제법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불만을 표출했다. 이라크 중앙 정부 역시 쿠르드의 분리주의 책동을 반대한다며 비난에 동참하였다. 논란이 불거지자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는 다양한 도안 중 하나로 공식 우표가 아니라며 진화에 나서야 했다. 교황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러한 정치적 흔적을 보면서 중동의 복잡한 실상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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