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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업 전공 만들려면... 학내정치·관료제 '산 넘어 산'

입력
2021.03.23 04:30
수정
2021.03.23 07:2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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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과거에 붙들린 대학

편집자주

산업이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그러나 산업 현장이 원하는 인재를 배출해야 할 대학은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 턱없이 부족한 IT 개발자를 모셔가려고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연봉을 높인다. 상아탑이 산업 흐름에 뒤처진 원인과 해법을 진단하는 기획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2021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코로나19로 인해 영상으로 열렸다. 사진은 학생들이 글로벌기업 인사들의 입학 축하 메시지를 보는 모습. 서울대 제공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2021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코로나19로 인해 영상으로 열렸다. 사진은 학생들이 글로벌기업 인사들의 입학 축하 메시지를 보는 모습. 서울대 제공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빅데이터. 서울대는 이 문제를 다룰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을 지난해 새로 출범시켰다. 2014년 연구기관으로 시작한 빅데이터연구원을 정식 대학원 과정으로 업그레이드한 것. 학계에서는 '2014년 연구원 출범→2016년 대학원 설치 논의 시작→2020년 대학원 개원'이란 과정에 대해 "그만하면 아주 성공적인 케이스"라 평가한다. 하지만 이 성공 사례를 들여다보면, 한국에서 신산업에 맞춘 대학, 대학원 교육 과정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 드러난다.

최근 서울대에서 만난 차상균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은 “AI는 도메인 지식(특정 분야의 파편적 데이터 흐름을 해석할 수 있는 배경지식) 없이 혁신이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학부 전공자가 모이는 대학원 설치를 구상했다"면서도 “'학부과정 건드리면 하세월'이란,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원이라고 쉽지 않았다. 차 원장은 “학교 관계자가 국회에 가서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 규모라면 빅데이터 연구하는 대학원생을 300명쯤 뽑아야 한다’고 했다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곤욕을 치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최종 확정된 규모는 '매년 석사 40명, 박사 15명 선발'이다.


예산 마련, 교수진 구성 ... 곳곳이 암초

출발부터 막막했다. 대학원 과정은 만들고 싶은데 어디에다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신산업 인재 배출과 관련된 일은 교육부를 비롯,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심지어 환경부와도 관련 있었다. 기회될 때마다 AI, 빅데이터 전문가 육성을 얘기하다 보니 주변에서 고용노동부의 ‘4차산업혁명 선도인력 양성’사업을 알려줬다.

이 예산을 받아다 비학위 교육프로그램부터 꾸렸다. 빅데이터연구원 시절 2017년 6월부터 2년간 학부 졸업한 미취업자들에게 AI 에이전트, 빅데이터 플랫폼 기술 등을 가르쳤다. 230여 명의 학생 가운데 150명가량이 카카오, 네이버, 삼성전자 등에 취업했다. 학내외에서 썩 괜찮다는 평이 나오자 그제야 대학원 설립에 가속력이 붙었다.

하지만 그다음엔 교수진 구성이 문제였다. 전기?정보공학부 등 기존 학과 교수 중 몇몇을 대학원 소속으로 옮기고 외부 인력을 물색했다. 국내 기업들도 AI인재 구하기가 힘들다는 상황에서, 박봉에다 규제도 심한 국립대에 오겠다는 ‘박사’ 전문가를 찾기가 어려웠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더 손사래를 쳤다.

온갖 구애 끝에 '겸직이 된다면 생각해보겠다'는 AI전문가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학교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서울대는 교수의 기업체 겸직을 총장 허가 사항으로 규정해뒀는데, 그것도 '주당 8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이 때문에 해당 전문가 임용은 결국 무산됐고, 지난해 12월 그나마 해당 규정에서 ‘8시간 이내’를 삭제했다. 그 덕에 이번 달에 구글 리서치 엔지니어로 일하는 이준석 박사를 조교수로 데려올 수 있었다.


8일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연구실에서 만난 차상균 원장이 학과를 소개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8일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연구실에서 만난 차상균 원장이 학과를 소개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관료제, 학내정치 ...과 하나 만들기도 버거워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설립 과정에서 보듯, 신산업에 맞춘 전공 하나 만들려면 ‘산 넘어 산’이다. 새로운 학과를 만들기로 했다면 소속 단과대에 이어 다른 단과대의 동의를 받고, 교무처 산하 위원회가 학과개설을 검토하고, 교무위 논의를 거쳐, 총장 부총장 학장들이 최종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건 단순히 관료제의 문제가 아니다. ‘학내 정치’가 끼어든다. 수도권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수도권 지역 대학은 총 학생정원을 늘릴 수 없다. 새 학과를 만들면 다른 학과 정원을 줄여야 한다. 다른 학과 교수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상위권 대학들일수록 미달학과 등이 적기 때문에 조정의 여지는 더 줄어든다. 차상균 원장이 ‘학부 건드리면 하세월’이라 여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대학은 대단히 관료적인, 독과점 기업과 비슷하다"며 "좋은 대학일수록 정원이 차니까 굳이 바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학내 정치는 4년 주기로 치러지는 총장 선거도 작용한다. 서울 한 사립대 교수는 “대학에서 총장 교체는 정권교체랑 비슷하다"며 "새 총장이 전 총장과 대척점에 섰다면 ‘역점 사업’에 대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학과 개설 지원이 대폭 축소되거나 무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산업 가르칠 수 있는 교수는 20% 수준"

전문가들은 학과 '신설'보다 학과 '재편'이 낫다고도 한다. 커리큘럼만 대대적으로 손봐도 기존 학과가 신산업을 소화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 전기차 바람이 거센 자동차 관련 학과가 대표적이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지난해 학과를 학부로 바꾸고 커리큘럼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며 "하지만 대부분 대학에서 학과 신설보다 교수 재교육이 더 어렵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국내 전기차 수요인력을 조사 중인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박사는 “자동차 산업에 관여하는 공대 교수들 대부분은 기계공학을 전공해 엔진 같은 기존의 내연기관을 가르친다"고 꼬집었다. 이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공계열 교수들은 위계서열도 엄격한 편이라 신산업 분야를 전공한 저연차 교수가 커리큘럼 개편 같은 얘길 입에 올렸다간 ‘쓸 때 없는 짓 하라말라’는 핀잔 받기 일쑤다. 학과가 아니라 과목 몇 개 더 만들거나 조정하는 일인데도 그렇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문제는 거의 모든 학과에 다 있다. 임성수 국민대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교수는 “솔직히 현재 산업 트렌드를 가르칠 수 있는 교수는 전체 교수의 20%가 채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AI연구가 아니라 IT개발 같은 학부 졸업생에게 가르칠 것부터 그렇다. 임 교수는 “IT개발자 능력의 핵심은 컴퓨터 언어를 빨리 익혀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일종의 ‘외국어 구사 능력’인데, 국내 컴퓨터 관련 학과에서는 '프로그래밍 언어는 왜 이런가' 이론만 따지다 끝나는 과목이 부지기수"라 말했다.

바이오?헬스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바이오 관련 인력은 1년에 1만3,000명쯤 배출되는데 규모로는 절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양이이 아니다. 학부과정에서 유전체, 유전공학과 같은 원론만 배우고 졸업하니 기업으로선 답답하다. 이 부회장은 “대학이 기업에 딱 맞진 않더라도 최소한 60~80% 정도는 되는 인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며 "기존 교수진이 이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산학협력 지원해도 비즈니스 경험이 없다

이건 정부 지원과 별개의 문제다. 아니, 솔직히 '이런저런 정부 지원을 대학이 잘 이용해먹지도 못한다'는, 다소 냉소적인 반응까지 나온다.

한국연구재단이 올 초 발간한 ‘산학협력 활동조사보고서’를 보면, 2019년 기준 국내 대학의 기업 기술이전은 4,818건, 액수로 1,019억4,400만 원에 달한다. 얼핏 대단한 것 같지만 이를 국내 대학 과학기술분야 전임교원 1인당 기술이전 건수로 계산하면 0.098건에 그친다. 그나마 체결 기업의 84.7%는 중소기업이고 대기업 비율은 1.6%다. 전체 대학의 과학기술분야 연구비를 기술이전료로 나눈 연구개발투자 회수율은 1.73%다.

대학과 기업의 공동연구도 그렇다. 같은 보고서에서 2019년 국내 4년제 대학의 산학협력 연구수익은 4조8,807억 원이었다. 이 가운데 80.4%는 중앙?지방자치단체 산학협력에서 발생했고 산업체 연구수익은 6,602억원(13.5%)에 그쳤다. 대학교수들이 '정부 지원이 부실해서 산학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다.

이런 비효율에 대해 전문가들은 비즈니스 경험 부족을 원인으로 꼽는다. 삼성전자-카이스트 산학협력단장인 김정호 전기및전자공학과 교수는 “새 기술이 개발돼도 사업화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수가 이런 경험이 없다"며 "논문을 위한 논문이 되지 않으려면 연구에서부터 비용 개념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공계열 교수들을 보면 기초연구분야에서 미국 박사 학위를 받고 와서 그 주제를 계속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익숙한 주제인 데다 미국 학회 참여가 상대적으로 쉬워 '등재하기 쉬운 논문'은 잘 쓴다"고 말했다.


연도별 대학 산학협력 연구수익 현황(왼쪽)과 연구과제 건수. 한국연구재단 제공

연도별 대학 산학협력 연구수익 현황(왼쪽)과 연구과제 건수. 한국연구재단 제공


나눠먹기 될 우려 피해야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이야기는 마냥 해피엔딩인 것만도 아니다. 대학원 설치 반년 만에 서울대에는 ‘대학원 협동과정 인공지능전공’이 생겼다. 이건 과기부의 AI지원대책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대학원이 학문과 산업, 양 진영에 다리를 걸치는 쪽에 가깝다면, 협동과정은 AI 핵심 기술 그 자체에 집중한다. 정부 자체가 부처 간 조율을 거친 통합적인 지원책 대신 듬성듬성 그때 그때의 대응책을 내놓아 한 대학에 AI 관련 대학원이 2개 생긴 셈이다.

정부의 문제는 학교의 문제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황우현 제주에너지공사 사장(서울과기대 교수)은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을 대학교육에 적용한다면 재료공학, 기계공학, 제어계측, 전기?전자공학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가 관여하게 된다"며 "그 수많은 분야 중 누가 어떻게 교육의 중심을 잡을지, 정부나 대학 등 내부 사정에 따라 너무 많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정부와 대학, 학과가 상호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 변화를 맞아 우리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나가겠다'는 명확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결국 학내 파워게임을 통한 '나눠먹기'로 결론날 위험이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이윤주 기자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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