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12조 1항은,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법률에 의지하지 않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고문을 받지 않으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의 ‘국민’이란 당연히 ‘인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만일 인간과 유사한 신체와 의식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있고,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면, 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동일한 법률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을 제기하고, 재판을 받을 수 있을까?
조광희 작가의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은 인간 vs 안드로이드 재판이라는 사건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실제 변호사이기도 한 작가의 전문성이 총동원된 소설이다. 살인사건, 안드로이드, 인간중심주의, 안드로이드의 헌법적 권리라는 화두를 정밀하게 세공함으로써 ‘SF 법정드라마’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소설의 배경은 22세기, 안드로이드가 상용화된 시대다. 인공언어 개발자인 한시로 박사는 “나와 정말 잘 맞는 동료를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외모와 지식을 빼닮은 안드로이드 ‘아오’를 제작한다. 나아가 인간 신경세포와 유사한 생체조직과 전자회로가 결합된 ‘의식 생성기’를 아오에게 주입하기에 이른다.
의식 생성기를 통해 안드로이드 아오에게는 인간과 비슷한 ‘의식’이 생긴다. 이로써 주인 한시로의 요구에 무조건 순종하던 로봇 아오는 의지를 표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아오는 자신이 한시로 본체라고 착각하게 되고, 반대로 아오로 오인한 한시로를 살해하게 된다.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살해한 사건은 이제 치열한 법정 다툼으로 번지고, 기계인 로봇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도화선이 된다.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양측 변호사의 팽팽한 법정 공방에 할애된다. “인간에게 적용되는 법률상의 형식적인 절차가 의식 있는 안드로이드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재판의 쟁점은 나아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죄와 벌이란 무엇인가라는 윤리적, 철학적 질문에까지 도달한다.
“‘안드로이드를 피조물 또는 생명체의 하나로 보고, 안드로이드에게도 그 권리를 확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안드로이드가 자연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법정 소설로의 정체성 못지 않게 SF소설로의 매력도 훌륭히 갖췄다. 나노 로봇을 통해 뇌의 특정 영역을 수술하면 수십 년간 명상 수련을 한 선승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는 ‘선(Zen)’ 수술, 기체 분자의 공기 중 흐름을 정교하게 통제하는 기술이 발전하며 탄생한 ‘후각예술’, 여성과 남성 중간의 모습을 하고 법복을 입은 AI판사 등 미래에 대한 다양한 설정이 소설의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을 쓴 조광희 작가는 현직 변호사이자 ‘밤과 낮’, ‘멋진 하루’ 등의 영화를 제작한 영화인이다. 2018년 당시 안철수 대선후보의 캠프에서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전임 시장과 유력 정치인의 비리 의혹을 파헤친다는 내용의 장편소설 ‘리셋’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작가는 후기에서 “다른 존재에게 끔찍한 고통을 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부터 이 소설이 출발했다고 말한다. 동물의 권리와 동물해방운동에 대한 오랜 고민은 나아가 생명과 생명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는 소설 ‘인간의 법정’으로 탄생했다.
참고로 소설에 등장하는 ‘로봇기본법’이 단지 허구적 상상력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는 지난 2017년 7월 “로봇에 대해 특정권리는 물론 의무를 가진 전자적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토록 하여 윤리규범을 준수하도록 하는 ‘로봇기본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EU의회 역시 정교한 자율성을 가진 로봇에 대해서는 전자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담은 ‘로보틱스에 관한 시민적 규칙’을 법사위원회에 의결하기도 했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법정에 선다는 소설 속 상상력 역시 곧 도래할 미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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