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공정 사회'의 좌표
공정사회 기대감 낙관에서 비관으로
비정의 축적되며 불공정 인식 커져
조국·LH사태로 '공분'의 물 넘쳐 흘러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한국사회학회와 공동으로 '탈진실시대, 보수-진보를 넘어'를 2021년 연중 기획으로 준비했습니다. 진영 논리로 진실의 실체가 흐려지고 있는 지금 한국 사회를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주제인 '불공정 사회'를 시작으로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한 전문가들의 대담과 심포지엄이 차례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공정’이 시대의 화두다.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공정’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사회는 ‘불공정’ 문제로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 입시 특혜 의혹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정권의 핵심 가치를 뒤흔들었다. 최근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전셋값 인상 논란은 현 정부 인사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건 끊임없이 이어진 '불공정' 이슈의 결과물일 것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와 김정희원 미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지난달 24일 한국일보·한국사회학회 공동 연중기획 '탈진실시대, 보수-진보를 넘어'의 첫 번째 주제인 '불공정 사회'를 놓고 벌인 좌담회(사회: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에서 공정을 최우선으로 놓았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배신감을 주요하게 거론했다. 이들은 사회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마땅할 진보세력이 전혀 그렇지 않음에서 폭발했다고 진단했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그 어떤 정부보다 공정한 출발선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는 불공정 논란이 뜨겁다.
신진욱 교수(이하 신)= (불공정 이슈의) 과거를 복기해본다면 ‘88만원 세대’론이 나온 게 2007년이고, ‘헬조선’ 담론이 최고조였던 건 2015년이다. 그랬던 것이 문재인 정부 초기 공정사회에 대한 낙관과 기대로 반전됐다가 정권 후반기 다시 악화 추이로 돌아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같이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조차 여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배신감, 그만큼 더 격한 감정적인 반응이 (시민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김정희원 교수(이하 김정)=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만 불거진 문제가 아니고 장기적·구조적인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함께 봐야 한다는 인식에 동의한다. 정의라는 것은 ‘합당하다’, ‘옳다’고 믿는 어떤 원칙이 준수되는 것, 직접적인 행위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공정이라는 인식은 이런 정의로운 행위가 축적되고, 반복적으로 지속되면서 생겨나는 인식이다. 불공정한ㆍ정의롭지 못한 현상이 현실에 축적됐기 때문에 우리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불공정 사회에 대한 진보와 집권세력의 책임,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불공정을 다뤄야 할지 이야기 해보자.
신=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공정’, ‘정의’, ‘평등’이라는 진보 집권 세력의 정치적 가치로 ‘언어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런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 내지는 진보세력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상황은 진보 세력에게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평등하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더 뼈아프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진보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 아닐까. 진보 진영에서 더 자신의 권력을 두려워했어야 한다. 진보가 가진 권력에 자정 장치를 더 엄격하게 작동시켰어야 하고, 더 깊이 권력의 위험을 성찰했어야 된다. 진보세력의 일부가 민주화 이후 권력화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시작됐다. 과거에는 보수의 전유물이었던 권력형 비리가 이쪽(진보)에서 터지고, 국민의 공분을 사는 상류층의 사고와 언어가 삐죽삐죽 노출이 된다. 진보를 지지하던 국민 입장에서는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당연히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데 점점 해명이 없어지고, 강행이 이뤄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뭔가 물이 고여 왔다. LH, 조국 사태 등이 터지면서 물이 밖으로 확 넘치게 된 것이다. 진보란 정의의 개념이다. 진보란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고, 침묵 당하는 사회적인 약자ㆍ배제된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는 결단이다. 그래서 진보는 보수와는 다른, 특별한 권력이 되고자 하는, 특별한 자기 성찰이 있을 때 권력화되면서도 이 같은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김정= 본인이 진보세력이라고 말하려면 기본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 기득권을 반복 성찰하고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진보주의자는 우리 사회의 약자, 가장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조국 사태 등 최근 벌어진 여러 사건을 보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특권을 이용하고 세습하는 성향을 많이 보여줬고, 그에 성찰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더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강해지지 않았나.
-의대생들의 국시 재응시 문제, 조국 전 장관 딸의 입시 특혜 의혹 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들이 청년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20ㆍ30대에게 불공정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신= ‘88만원 세대’ 책이 나올 그 시기에 그토록 분노하고 "미래가 없다"고 말하던 세대가 지금 30ㆍ40대다. 청년층 내에서 안정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 범위는 매우 좁다. ('88만원 세대'였다가) 안정된 위치에 간 사람들이 (비정규직 등에게) "시험 봐서 내가 이 이른 나이에 내부자의 위치로 들어왔는데, 어디 시험도 안 보고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부자'의 위치로 진입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또 (내부자 위치에 들어가) 공정성 개념이 각인된 청년층이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청년층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청년층의 불공정의 본질은 ‘계급의 문제’라고 본다.
김정= 성별·세대 갈등이라기보다 전체적으로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정성 담론이 사실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차별화 기제로 사용될 때가 많이 있는 것 같다. 남녀 문제도 그렇고 여성과 트랜스젠더 간의 문제도 그렇다. 예를 들면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을 사람들이 비난하는 논리가 공정성이었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비판하는 논리로 ‘공정하지 않다’란 말을 사용했고, 남성이 여성 취업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로 얘기가 돼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 논리가 무기화되고 있다’고 지적을 했었다.
-공정성의 개념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다고 보나.
신= 기회균등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역은 교육이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학업성취도를 말할 때 중요한 변수는 부모의 재산, 직업, 나아가 부모의 교육과 문화수준이다. 이런 게 학업성취도의 차이로 나타난다. 기회의 불균등을 만들어내는 비가시적이고 은닉되어진 사회적 전제들이다. 단순히 규칙을 지켜 달린다고 페어플레이가 될 수는 없다. 출발점이 같아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동일한 출발선에 있더라도 육상용 신발을 누가 신었느냐, 평상시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기회균등을 위해 자유경쟁을 하는데, 이처럼 전제들이 다르면 자유경쟁이 아니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 노후 불안, 끔찍한 자살률,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의 복지 지출 규모를 봤을 때 우리와 비슷한 경제수준의 나라들에 비해 너무나 공정의 조건이 비참하다.
김정= 정의로운 사회는 기회균등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동등한 기회가 제공되는 것과 그 기회를 활용해서 개인의 잠재력과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생애주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은 정책적으로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예컨대 코로나19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재택근무의 기회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주거안정성이나 돌봄노동의 조건에 따라 그 기회의 효과를 실현하는 데 차이가 있다. 기회균등을 넘어 적극적 재분배로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기회 평등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다. 비경제활동인구 통계를 보면 기회 박탈의 문제가 심각하다. 매달 '쉬었음' 인구는 최대치를 경신 중이고, 특히 20대의 경우 1년 사이 30%나 급증해 거의 50만 명에 달한다. 청년빈곤층의 자립을 위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보궐선거, 내년 대선 등 ‘정치의 시간’이 도래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과연 LH사태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뿌리 깊은 불공정의 현실을 제대로 다뤄나갈 수 있을까.
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압도적인 다수가 정치에 바라는 것은 ‘불평등 해소’, ‘격차 완화’ 등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게 선거 운동에서 정면으로 내세우는 쟁점이 된 적이 없다. 역대 정부 중 이 문제를 정책 최우선 순위에 놓은 경우도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마저 임기를 마치고 "내가 이걸 최우선으로 했어야 하는데"라며 회고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지금 작은 기회의 창으로 여겨지는 것은 코로나 상황이다. 비일상적으로 특정 계층에 고통이 집중되는 만큼,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과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민들이 불공정 문제를 얼마나 '실효적인 정치적 압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김정= LH사태를 봐도 어떤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문제해결의 단초가 시작됐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이러한 편법이나 불공정을 그냥 넘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나 혹은 내 조직이, 회사가 공정한 원칙을 가지고 일하나’란 것을 무의식적으로 관찰한다. 내 책임, 내 몫을 다했을 때 나의 안전이 확보된다는 확신이 주어지길 바래서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LH에서는 내부 정보를 활용해서 부동산을 구입했고, 편법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불확실성이 더 높아지는 조건이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나도 편법을 써야겠다’, ‘영끌해서 주식을 사야겠다’. ‘부동산에 투기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정부부터 이런 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항상 ‘포용국가’를 얘기하는데, 그 단어가 정확하게 뭘 뜻하는지 정책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코로나 이후에도 다른 종류의 위기가 계속 닥쳐올 것이다. 그중 하나는 기후위기이다. 고통스러운 재조정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또 새로운 불평등과 부정의가 일어날 수 있다.
-공정성과 관련해 한국 사회와 시민들의 시급한 현안이 무엇일까. 가장 먼저 정비 내지 전력을 다해 노력해야 할 분야를 얘기하자면.
김정= 한국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이 높은 편이고, 사회 문제에 반응해 거리로 나가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것이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참여로 이어지는가는 다른 문제다. 시민들이 '촛불의 경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좀 더 지속가능한 정치 참여로 이어지는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혹은 가장 분노하게 되는 사안이 있을 때, 해당 사안과 관련해 장기적 활동을 펼쳐 온 사회단체를 찾아보고 한번쯤 활동을 함께 해보는 것이다. 시민사회 영역에서 의미 있는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 많고, 이들은 매우 훌륭한 정치참여 학습의 장을 제공한다. 이런 시민사회 활동이 축적되면서 정의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신= 어디서 변화를 위한 시작이 이뤄져야 할까. 그것은 문제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다. 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문제를 의제화하고 끌고 나갈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이 2000년대 이후 꾸준히 강화돼 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1990, 2000,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사회단체의 양적 팽창이 점점 가속화했다. 특히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는 것은 대부분 지역 단위의 풀뿌리 단체들이다. 우리 모두 각자 어딘가에 속해있으면서도 나만 속해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단체들이 물밑에서 네트워크(연결망)를 이루다 큰 이슈를 만나면 물 위로 치솟아 올라 서로 놀라게 되는 시민사회의 잠재력이 나온다.
김석호 교수= 시민단체의 힘을 최근 경험했다. 코로나 대유행 때 대구지역 시민사회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연구했는데, 놀랍게도 쪽방촌 주민, 이주자 공동체 등 소외된 사람들이 방역과 구호물품의 플랫폼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한 보건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활동하는 전문성을 갖춘 시민단체들도 많아지고 있다. 공정사회로 향하는 길목에 희망이 있다.
※신진욱 교수(50):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사회정책학회 부회장,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와 시민사회’, ‘시민’, ‘다중격차,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공저)’ 등을 저술했다.
※김정희원 교수(39):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후 미국 럿거스대에서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미 커뮤니케이션학회 조직 연구 분과에서 다양성과 포용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석호 교수(49):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지역사회학회 회장, 한국조사연구학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국사회의 세대 간 공정성’, ‘ ‘촛불 너머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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