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페미니스트로 학계에서 살아남기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선진의 지식을 다룰 것 같지만 학계는 세상의 변화를 느리게 받아들이는 곳이다. 지난 몇 년간 페미니즘의 물결이 이토록 거세게 한국을 휩싸는 와중에도 학계에서 여성의 삶과 목소리를 반영하는 지식은 너무 더디게 생산되고 있다. 언론과 출판 시장이 시대의 변화에 반응하여 페미니즘 글을 부족하게나마 활발히 펴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것마저도 그 세계의 여자들이 고군분투한 결과일 테지만.
학계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더 어려운 일은 학계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남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속한 학문 분야가 심각한 남초이거나 페미니즘에 무척 적대적인 곳이라면? 공대라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순간 지옥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를 환영하는 학문 분야는 여성학 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회학, 사학에서도 쉽지 않은데 자연과학과 공학에서는 오죽할까.
페미니즘은 기존 지식의 남성 중심성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렇지 않은 연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멀리서 비판하고 싫어서 떠나기보다 머물며 고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더 어렵고 위대한 일이다. 이번 글에서는 내 경험에 빗대어 학계에서 페미니스트 연구자가 겪는 어려움과 함정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여성학 외에 학문 분야에서 여성, 혹은 페미니즘과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거나 하고 싶은 분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들이 덜 외롭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앎과 삶을 분리하기 어려운 여자들
대학원에서 과학사를 공부하고 우울증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원래는 그냥 우울증이 아니라 ‘여성과 우울증’이 주제였으나 졸업을 향한 여정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결국 논문에서 빠졌다. 막판에 여성의 문제를 다룬 절 하나를 통째로 날렸는데 졸업하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원래는 과학철학 꿈나무였다. 고등학교 때 이 분야를 처음 알게 된 이후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리라 마음을 먹고 학부 전공으로는 자연과학을,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했다. 이 분야와 관련한 모든 학부 수업을 들었고, 성적도 좋았고, 졸업논문으로 쓴 과학철학 논문으로 최우수 논문상도 받았다. 지도교수가 될 분을 미리 찾아가 여쭙기도 했다. 제가 뭘 더 공부하면 좋을까요?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해볼까요?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이 학문을 사랑했고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었으며 당시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는 것이다.
막상 대학원에 들어와서 인생이 잘 안 풀렸다. 첫째는 돈 때문이었고 둘째는 페미니즘 연구 때문이었다. 일단 돈이 없어서 여러 번 휴학을 반복했고, 학비와 생활비를 동시에 버느라 공부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로 만회할 수 있던 시기가 저물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석사 논문은 여러 차례 심사에 오르지 못했다. 동기와 후배가 멀쩡히 졸업하는 것을 지켜보며 5년의 시간을 들여 석사를 졸업했다.
처음 연구하려던 것은 성차였다. 여성과 남성의 성차는 진정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싶었고, 생물학의 철학에서 섹스·젠더와 관련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학철학은 꽤 보수적인 학문이어서, 과학의 본성을 상당히 내재적이고, 언어적인 관점으로 탐구하는 듯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유전자’, ‘에너지’, ‘적합도’와 같은 이론 용어와 기호는 과학 이론에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용어는 경험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과학 이론 속 용어들이 실제 세계를 적절히 대응한다고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푸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도쿠 같았다. 스도쿠 퀴즈를 풀면 머리를 굴리며 해답을 찾아 나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할수록 똑똑해지는 기분도 든다. 그러나 스도쿠는 스도쿠일 뿐, 스도쿠 바깥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2016년 강남역 여성표적 살인사건 이후 나는 스도쿠 같은 공부는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앎을 삶과 분리할 수 없었다.
과학은 지식 생산에서 독점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누린다. 그 안에 여성을 배제하고 소외한 역사가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언급하는 것 없이 과학적 합리성의 본성을 논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전공을 과학철학에서 과학사로 옮겼다. 과학사 수업 때는 그래도 여성 과학자나 젠더에 관한 글을 읽는 주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사 내에도 여전히 페미니즘 연구는 소수였고, 무엇보다 이 분야를 지도해줄 교수가 없었다. 여자 교수조차 없었다.
분명 페미니스트 과학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있었을 텐데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관심 분야와 유사한 논문을 발견해서 반가워 해당 연구자가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 찾아볼 때마다 절망스러웠다. 온라인으로 검색조차 잘 되지 않았다. 건너건너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땄는데 자리를 계속 못 잡으시다가 학계를 떠나셨대.' '이 분야에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박사 학위를 십 년 만에 겨우 받았대.' '요즘 공무원 시험 준비하신대.' '완전 잠적하셨대.'
갈 곳 잃은 페미니스트 연구자
여성학은 학계에서든 대중에서든 학문의 전문성을 자주 의심 받는다. 당연하게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학문인데 여성이면 다 여성학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타 학문 분야에서 페미니즘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편파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더 높은 학위를 받으려고 할수록, 더 높은 자리에 채용되려 할수록 문제가 심해진다. 이러한 차별은 교묘하게 작동한다. 문제를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게이트키퍼(지도교수)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들이 보통 남자다. 이들은 여성의 삶만큼이나 페미니즘 연구도 잘 모른다.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둘째, 페미니즘 연구를 하면 편향된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 연구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까다롭고 높은 잣대로 평가 받기 쉽다. 설득이 더 어렵다.
셋째, 페미니즘 연구를 하는 사람의 수 자체가 적어 동료를 찾기 힘들다.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학술 공동체가 대단히 중요한데 이를 형성하기 어렵다.
넷째, 해당 분야에 이미 존재하는 페미니즘 연구가 적거나 단단하게 무르익은 단계가 아니어서 연구에 인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잦다. 인용하더라도 신뢰할 수 없는 출처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섯째, 이 모든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같은 분야에서 시시때때로 시비를 거는 안티페미니스트와 싸워야 한다.
여섯째. 가장 중요하다. 이 모든 차별과 어려움과 억울함과 배제가 보이지 않거나 은폐된다.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학위를 받거나 자리를 잡는 데에 실패한다면?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답을 듣게 된다. “당신이 부족해서”.
당신이 부족해서. 이 말은 앞에서 열거한 모든 어려움을 가리는 말이면서 동시에 연구자가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다(그러잖아도 대학원생은 자신에게 의구심을 품을 때가 많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것처럼 바꾸면서 문제의 원인을 개인화하고 연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다.
차별은 노골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고 조용하게 일어난다. 그게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든다. 짐작은 가능하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로 여러 번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잘났던 연구자는 점차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잃게 마련이다. 반복된 실패와 억울함이 층층이 쌓여 악에 받친 여자를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미친년 취급해왔나.
‘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똑똑한 여자가 하기 쉬운 실수다. 여태까지는 좀 불리해도 자기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세상은 여성이 진짜로 똑똑해질수록, 강해질수록, 그래서 위협적일수록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능력주의와 개인주의는 성차별을 직접 경험해도 이를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막고 문제를 탈정치화한다. 낮은 계급의 여성을 논의에서 배제할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명 한 명이 ‘슈퍼우먼’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작당모의'라고. 똑똑하고 능력 출중한 여성뿐 아니라 어딘지 좀 어수룩하고 모자란 여자도 잘 자리 잡는 시대여야 안심할 수 있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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