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엄마] <4>전문가정위탁 엄마
편집자주
여기 한 엄마가 있습니다. 낳은 자녀 셋에, 위탁모로 키운 아이 다섯까지 모두 여덟 명의 엄마입니다. 친권을 가진 부모가 아이를 기를 수 없을 때 혈연관계가 아닌 일반인이 대신 맡아 양육하는 일반 가정위탁을 하다가, 나중에는 학대피해 아동이나 장애아 같은 전문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아동을 맡아 기르는 전문 가정위탁까지 하게 된 엄마입니다. 전문 위탁은 일반 위탁을 3년 이상했거나 사회복지사 같은 특정 자격을 가진 경우 가능합니다. 전국에 이런 전문 위탁 가정은 단 25세대뿐입니다. 일반 위탁보다도 훨씬 힘들어서입니다. 그럼에도 그 어려운 길을, 이 엄마 고영미(53ㆍ가명)씨는 왜 택했을까요. 그를 오랜 기간 설득해 만났습니다. 그는 신원을 최대한 가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혹시라도 위탁 아동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서입니다. 이 엄마의 이야기, 함께 들어보실까요.
13년간 학대피해 아동 5명 맡아
폭식에, 장난감 부숴 분노 표출
“그랬던 아이가 사랑을 표현해요”
하늘에서 그거 다 보셨죠? 이제 다섯 살 된 현민(가명)이가 요즘 하는 예쁜 짓.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 다가와서는 ‘쪽’ 뽀뽀를 해주곤 가잖아요.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니었던 거 누구보다 잘 아시지요? 5개월도 채 되지 않아 이렇게 달라지고 있어요! 현민이보다 두 살 많은 형 서준(가명)이는 어떻고요. 요전 날에는 좀 피곤하기에 “오늘은 목욕 하루 건너뛸까” 했더니 “엄마, 나 샤워하고 싶어요” 하는 거예요. 어찌나 신기하던지!
◇손만 잡으려 해도 움츠리던 아이
작년(2020년) 10월, 요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어땠는데요. 방금 샤워한 아이들이 머리를 계속 긁기에 봤더니 글쎄, 머릿니가 득실득실 했잖아요. 이제 5학년된 태형(가명)이는 “옮으면 어떡하냐”며 “난 얘들이랑 함께 못 잔다”고 난리를 치고요. 결국 애들 머리칼을 짧게 자르고 머릿니를 이 두 손으로 다 잡았죠.
아이들이 물을 무서워하는 걸 보니 잘 씻지를 못했나 봐요.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도 아니고 얼굴에 물방울이 닿기만 해도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었으니까요. 한번 씻기려면 얼마나 많이 진을 뺐는지요.
제 친엄마와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런 걸로 짐작을 할 뿐이죠. 밥 먹을 때마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일단 밥을 고봉으로 쌓거나 “자, 가자” 하면서 손을 잡으려고 하면 반사적으로 한껏 움츠러들면서 두 팔로 머리를 감싸거나 했으니까요. 그런 걸 보면 ‘제대로 못 먹었구나’ ‘맞기도 많이 맞았나 보다’ 하는 거죠. 친모가 아이들과 모텔에서 살았다는 것, 신고로 아이들에게서 분리조치 된 것, 형제이긴 하지만 친부는 다르다는 것 정도만 들어서 알아요.
하긴 아이들을 처음 본 날 아침밥도 못 먹고 왔다고 해서 깜짝 놀라긴 했어요. 그러니 아이들이 일곱 살, 다섯 살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체구가 작았나 봐요.
처음에 제가 이 아이들은 받지 않으려고 한 거 당신께선 정말 잘 아시지요. 우리 둘째가 또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기도 했잖아요. “엄마도 그간 할 만큼 했다. 이제 우리도 집에서 편하고 조용하게 살아보자. 그런데도 아이들을 또 받으면 나는 집을 나가서 살 거야” 하는데 보탤 말이 있어야지요.
◇12년 위탁모 하고도 또 아이들 받은 이유
하긴, 그때까지 이미 낳은 자식 셋에다 가슴으로 품은 자식 셋까지 여섯을 키웠으니 저도 할 만큼 했다 싶었어요. 제 나이도 이제 오십을 넘어 쉰셋이라고요. 작년에 지역 가정위탁지원센터에서 “(학대피해 아동들이라) 일반 가정위탁도 아니고 전문 가정위탁을 해야 하는데 받아줄 가정이 없다” “남자아이 둘이라 그나마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사정해도 두 번이나 거절했을 땐 저도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 당신께서 자꾸만 저와 그 아이들을 이어 주셨어요. 기도를 하면 “얘야, 그 두 형제는 당장 오갈 데가 없는 아이들 아니니. 네가 왜 도움을 못 주느냐” 하셨죠. “위탁도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해야 하는 거잖아요. 둘째가 저렇게 반대하는데 어떡해요” 하소연하면, “네 딸은 그저 조용히 살 수 있는 집을 원하는 거지만, 그 아이들은 돌봐줄 가정이 필요하다. 누가 더 다급한 처지냐” 하셨고요. 그 말씀에도 저는 버텼어요. “제가 낳은 아이들도 중ㆍ고교 때부터 12년이나 양보하면서 자랐다고요.”
그럼에도 제게 주시는 응답은 일관되더군요. 심지어 독서 모임에 가서 책을 읽는데도 ‘사람을 키우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냐’는 메시지가 또렷했어요.
그렇게 한 달 반을 당신과 실랑이한 끝에 이제는 제가 더는 물러설 곳도, 반박할 거리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서준이와 현민이를 받기로 한 거예요. 결단을 하고 지역 가정위탁지원센터 직원한테 설명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오지 뭐예요. 그간 복잡했던 마음이 그렇게 표출이 됐나 봐요.
그래도 속으로는 뭔가 다시 해볼 힘이 생긴 느낌이었어요. 그 에너지를 당신께서 주신 걸 알아요. 내심 둘째가 걱정이긴 했어요.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제게 주신 말씀 그대로 설명하면서 설득했어요. 반쯤은 ‘얘가 끝내 집을 나가 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싶었죠. 지금 어떻게 됐는지는 위에서 다 보고 계시지요? 누구보다 현민이를 둘째가 예뻐하잖아요. 툭하면 제 방에서 현민이를 재울 정도로.
◇넷째 낳는 대신 선택한 가정위탁
생각해 보면, 제가 참 단순해요. 정부에서 산아 제한을 그렇게 강조하던 때 아이를 셋이나 낳았잖아요. ‘둘만 낳아 잘 키우자’ 운동까지 하던 때라, 셋째한테는 건강보험 혜택도 안 주더라니까요. 아이 셋을 데리고 중화요리 집만 들어가도 사람들이 무슨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봐서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나중에 그 셋째가 대학갈 때는 세상이 바뀌어서 ‘다자녀 장학금’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나만 속으로 ‘공평하시다’며 웃을 뿐이었죠.
‘아이를 최소한 넷은 낳아야지’ 했던 결심은 여하튼 그래서 실천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포기를 못하고는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덜컥 이런 기도를 해버렸지 뭐예요. ‘제가 넷째는 가슴으로 낳을게요.’
그 기도가 위탁모로 이어져서 오늘에 이를 줄은 몰랐죠. 처음에는 입양 전 아이들을 잠시 맡아 키우는 위탁만 알고서 그걸 하겠다고 했거든요. 알고 보니 친부모가 사정이 있어 양육을 못하거나, 학대를 받아서 친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거예요. (아동복지)기관에서 그런 설명을 해주면서 일반 가정위탁을 한번 해보면 어떠냐고 권할 때도 참 나는 단순하게 결정했어요. 아니면 내게 이 일을 맡기려고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신 건가요. 남편이 “내 자식처럼 키울 자신이 없다”며 반대하는데도 나는 “오갈 데 없는 아이에게 그저 울타리가 되자는 생각으로 받으면 안 될까”라고 설득했으니까요.
2008년 그렇게 네 살 나이에 우리 집 막내딸이 된 아이가 지우(가명)예요. 아이는 몰랐지만, 지우 엄마도 지우를 입양한 거래요. 지우 엄마가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아 오갈 데가 없어진 거였죠. 그 엄마와 동거하고 있는 남자도 지우를 워낙 싫어했다고 하고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언제부터 머리칼을 못 다듬었는지 앞머리가 코 아래까지 내려와서 머리카락 사이로 빼꼼 쳐다보던 지우의 눈망울. 더 놀란 건 머리에 화상 자국 같은 게 있었던 거예요. 아이 머릿속에 10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로 상처가 있었으니까요. 마치 담뱃불로 지진 듯했죠. 다리에도 그런 상처가 있었고요. ‘커서 콤플렉스가 되면 어쩌나. 문신을 해줘야 하나’ 키우며 별 생각을 다 했어요.
생각해보면, 지우는 유난히 남자 어른을 무서워했어요. 살에 손이 닿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싫어했죠. 그러니 남편은 근처에도 못 갔죠. 그것뿐이에요? 집에 남자 손님이 오기라도 하면 어디로 숨어선 나오질 않았어요. 몸에 난 상처가 어떤 흔적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죠.
우리나라 나이로 말이 네 살이지 개월 수로는 세 살 남짓한 아이가 어찌나 눈치는 또 많이 보던지. 숟가락에 반찬을 놓아줘도 “제가 할 수 있어요”, 팔베개를 해줘도 “혼자 잘 수 있어요” 했잖아요.
정말 감사한 건요, 우리 집에 오기까지가 힘들었지, 일단 오고 나니 자연스럽게 가족이 됐다는 거죠. 막내는 “동생 생겼다”고 좋아했고, 둘째도 어딜 갈 때마다 지우를 달고 다녔으니까요. 나중에는 지우 자신도 누나 노릇을 톡톡히 했죠. 지우가 우리 집에 온 지 6년 됐을 때 여섯 살짜리 윤호(가명)가 왔잖아요? 지우가 네 살 어린 윤호를 보자마자 그러는 거예요. “나도 ‘고영미 엄마’한테 엄마라고 하니까, 너도 엄마라고 부르면 돼.” 어른이 위탁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도 지들끼리 위탁을 한다 싶었죠. 남들은 위탁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도 힘들 텐데 어떻게 여럿을 받았느냐고 놀라기도 하는데, 아이들끼리는 외려 금세 가족이 되더라고요.
◇위탁 아이는 곧 나였다
지우를 처음 만나 집에 데려오던 날 내 속을, 당신께선 눈치채셨을 거예요. 한 손에는 아이 옷가지가 담긴 보따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 손을 잡고 오는데 묘한 기분이 든 것을요. 마치 나를 데려오는 느낌이었죠.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이 나면서요. 온 가족이 타지로 이사가게 됐는데 함께 살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는 못 떠나겠다’고 드러누워버렸죠.
부모님의 선택은 저를 할머니 곁에 두는 거였어요. 언니, 오빠는 한창 공부해야 할 고학년이고, 동생들은 어리니까 가장 만만한 나이였던 저만 남기고 다 이사를 간 거예요. 3년간 할머니랑 살면서 엄마 얼굴은 자주 봐야 한 달에 한 번이었죠. 그때 제가 속으로 ‘혹시 나만 친자식이 아니라서 떼어둔 건가. 어릴 때부터 나만 다르게 생겨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던 게 사실인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나요. 형제들 얼굴도 명절이나 돼야 보니까 나중엔 가족인데도 어색해져 버렸죠.
지우를 데려온 날 생각이 났어요. 그때 내가 ‘나는 나중에 부모가 되면 절대 아이와 떨어져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한 걸. 넷째 아이는 가슴으로 낳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런 상처가 있는 아이를 내가 돌봐야겠다’는 데서 시작됐다는 걸.
그래서 지우를 데려오면서 그렇게 마음이 좋았나 봐요. ‘이 아이를 양육하면서 엄마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픔을 치유해줘야겠다’고 결심하면서요. 지우는 그러니까, 슬프면 안 되는 아이였어요. 바로 나였으니까. 지우를 키우면서 어릴 때 받은 상처가 비로소 씻기는 느낌이었어요. 아마 남들은 ‘무슨 소설 같은 소리냐’ 할 거예요. 그렇죠?
◇내가 채울 수 없는 한 가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이 말, 기억하시죠? 우리 집에서 6개월을 지낸 지우가 어느 날 저한테 그렇게 불쑥 말한 거요. 그때 제가 얼마나 설렜는지도 아실 거예요. 자기 엄마가 따로 있다는 걸 아는 나이여서 그랬는지, 그간엔 저를 어떤 말로도 부르지 않았잖아요. 유치원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가서 “지우야” 하고 외쳐도 아무 대답 없이 나와선 신발을 신었죠. 그러던 아이가 ‘엄마라고 해도 되냐’니 얼마나 기뻐요. 속으로 ‘그래도 내가 이 아이한테 기댈 만한 존재가 됐나 보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요. 다른 아이들과 다른 호칭을 쓰는 게 싫어서 엄마라고 부르겠다고 한 것을요.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가 있는데 저 혼자 나를 다른 호칭으로 불러서 주목 받기 싫었던 것을요. 그보다 더 지나서는 ‘언제든 제 엄마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고 사는구나’ ‘내가 아홉을 줘도 끝내 채워 주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구나. 그 한 가지가 아이들에게는 전부구나’라는 것을요.
길게는 7년을 함께 산 지우, 짧게는 2년 반을 지낸 윤호가 제 엄마나 아빠한테 돌아가는 순간, 딱 느꼈죠. 남들은 보통 드라마 같은 이별을 연상할지 모르겠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죠. 아이들은 “○○아, 인사는 하고 가야지~”라고 해야 겨우 뒤돌아보고 멋쩍게 고개 한번 숙일 뿐이죠. 둘 다 그랬어요. 껴안고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하는 건 없다는 거… 보통 사람들은 모르죠.
그 아이들 속을 다 아시겠지만, 제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이거예요. 이제 아이 옆에는 ‘내 엄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제 엄마가 곁에 있으니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은 거라고.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달았어요. 제가 절대 채워 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그거죠.
그래도 저는 감사해요. 그 아이들에게 내가 그렇게라도 쓰일 수 있어서, 잠시의 피난처라도 될 수 있어서.
◇아이들이 사고 쳐도 감사한 이유
아이들 키우며 속이 여러 번 새카맣게 탄 건 말해 뭐해요. 아무도 몰라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죠. 상처가 있는 아이일수록 과잉행동장애(ADHD) 증세를 보인다거나,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다거나,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거나 하는 일이 많으니.
여섯 살 때 와서 지금 열두 살이 된 태형이만 해도 그래요. 문방구 사장 전화를 받고 속으론 덜컥 했죠. 이미 두 번이나 물건을 훔치다가 걸렸고, 처음엔 봐줬지만 또 손을 대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다니. 태형이가 그나마 “물건 훔치다 들킨 걸 같은 반 친구가 봐서 부끄럽다”면서 “전학 가고 싶다”고 해서 다행이었어요.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잘못이란 걸 안다는 뜻이니까요. “내가 왜 사과하러 가야 하느냐”는 태형이에게 “너는 네 잘못을 사과해야 하고, 나는 너를 잘못 키운 걸 사과해야 하니 함께 가야 한다”고 설득해 가서는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요.
위탁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된 게 그거지요. 마음에 쌓인 불만이나 상처가 그런 방식으로 표출될 수도 있고, 부모에게 뭐가 잘못된 행동인지 배울 시기를 놓쳐서 그럴 수 있다는 거.
이것마저도 저는 감사해요. 아이들이 그래도 어린 나이에 제게 와서 바로잡을 기회가 생긴 거니까.
게다가 그랬던 아이가 변하는 걸 보면 ‘이런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하시려고 아이들을 보내셨나’ 싶어요. 태형이만 해도요, 하나님도 보셨죠? 얼마 전 집에 손님들이 오니까 “이거 잡수세요” 하면서 과자를 담아 내오고, 태권도 다녀오면 옷 벗어서 세탁 바구니에 탁 넣고 샤워부터 하는 거요. 사람들이 깜짝 놀랐잖아요. “아니, 얘가 이렇게 바뀌었어요? 언제부터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게 됐어요?” 하면서.
처음엔 눈에서 독기를 쏟아내면서 저를 노려보던 아이가 이제는 “엄마, 나는 ‘○○○(친부 이름) 아빠’를 만나지 못하지만, 이 집에 와서 가족들 사랑 받고 살게 돼서 정말 좋아요” 하니까요. 불안 증세가 심해 잘 때도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 자다가도 내가 옆에 있는 게 맞는지 발로 차보던 아이였죠. 그러기만 했어요? 로봇을 사주면 손발을 죄다 부러뜨려 놓곤 했잖아요. 그 아이가 이렇게 달라진 걸 보면 속상하고 힘들었던 게 다 잊혀요.
이런 저를 보면서 사람들이 가끔씩 묻데요? “그 아이들이 정말 그렇게 예쁘냐”고. 그거 아시잖아요. 아이들이 예뻐서 예쁜 게 아니라, 내 새끼라서 예쁘다는 거. 우리 집에 오는 순간 그야말로 내 새끼가 되고, 그래서 아이들을 보는 눈이 사랑으로 바뀐다는 거.
◇내가 태어나 둘째로 잘한 일
저는 지금 생각해도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우리 아이들 낳은 거예요. 하지만 위탁 부모로 아이 다섯을 더 키운 것도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무슨 표창을 준다고 한 적이 있어요. 고맙기는 했는데 솔직히 좀 우스웠어요.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 키웠다고 상을 받나요? 여기저기서 ‘인터뷰하자’ ‘방송에 출연해 달라’고 해도 절대 안 했던 이유가 그런 마음이었죠. 행여나 누가 나를 알아봐도 큰일이고요. 아이 친구들은 내가 위탁 엄마인 줄 모르니까요. 사람들이 그걸 알게 돼서 혹시라도 우리 아이들을 불쌍한 눈길로 보면 어쩌냐고요.
어찌 됐든 그렇게 두 번 엄마가 된 거죠. 첫 번째엔 철없는 스물셋에 결혼해 아이 셋을 낳으면서 준비 없이 엄마가 됐다면, 위탁 엄마는 내가 준비를 하고서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선택한 길이죠. 내가 낳은 아이들한테는 ‘노후에 내게 좋은 벗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기대나 욕심이 있지만, 위탁으로 키운 아이들에게는 바람도 없어요.
형편이 넉넉해서 한 일도 아니지요. 교인이 50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 목사 부부가 무슨 돈이 있어서요. 낳은 아이 셋도 비싼 학원 한번 못 보냈고, 가뭄에 콩 나듯 용돈 500원씩 주며 키운 변변찮은 형편인 걸요. 하지만 잘 살아야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내 전부를 주고도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주는 것, 그건 당신께 내가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키가 자라듯 지혜가 자라고, 믿음이 성장하게 해주세요. 사랑을 키우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겪어도 이겨낼 힘이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에필로그
모든 엄마들이 그렇겠지만, 자식 키우는 삶에 ‘꽃길’만 있을까요. 때로 ‘웬수’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내 속을 이렇게 모르나’ 서운해 가슴 치는 일도 있겠지요.
이번에 만난 ‘위탁 엄마’ 고영미(가명)씨에게는, 그 모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신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키우며 느낀 기쁨과 행복, 슬픔과 외로움을 가장 잘 아는 분도, 마음이 고민으로 요동칠 때 하소연하고 투정 부리기도 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기사를 신과의 대화 형식으로 쓴 이유입니다.
▶기사 보기 ? “권리 없이 양육만” 전문 가정 위탁 부모들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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