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BlackLivesMatter에 이어 #StopAisanHate가 펼쳐지고 있다. 이 해시태그들은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을 남긴다.
첫째, 전 지구적 감염병은 한 사회의 소수자를 더 열악한 위치로 내쫓는다. 위험과 곤란은 사회적 자원이 분배되는 경로의 역방향으로 분배(울리히 벡)되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인의 혐오발언은 해롭다. 미국 정치인들은 ‘우한 폐렴’ 운운하면서 낙후와 오염의 이미지를 중국에 덧씌웠고, 이런 정치적 수사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만나 아시아인 전반에 대한 혐오로 미끄러졌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자 민중은 저항을 멈추지 않고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싸운다.
이 와중에 뉴욕 지하철 폭행 사건에서 흑인이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고 있다. 사건 당시를 찍은 동영상이 SNS를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되었는데, “도둑질할 때도 사람 목숨 쉽게 여기는 흑인”(한국 온라인 게시판 댓글 내용이다)이 “피지컬적으로 맨날 뚜들겨 맞는 동양인”(이 역시 댓글이다)을 폭행하는 장면은 지금까지 이 세계를 풍미했던 수많은 미디어 재현의 스테레오 타입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러니 서슴없이 (흑인을) 쏴 죽이는 것”(마찬가지로 댓글이다)이라는 인식이 정당화된다.
미국 내 인종차별 및 인종 갈등의 심화에는 명백하게 ‘백인’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백인에게 이를 제대로 질문하는 것은 매번 실패한다. 왜인가?
영화학자 리처드 다이어의 '화이트(white)'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보여준다. 그는 백인중심적인 서구 문화 속 백인 재현을 비평하면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백인성’을 낯설게 보게 한다. 이를 위해 다이어는 우선 ‘흰색(white)’이 감각되고 이해되는 세 가지 방식, 즉 색조·피부·상징의 문제를 살펴본다.
일단 색조로서의 흰색은 색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색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때로는 ‘빛’ 그 자체로 다뤄지는 것은 물론이다. 흰 색조의 이런 속성은 피부로서 ‘흰색’이 가진다고 생각되는 여러 자질과 연결된다.
하지만 피부로서의 흰색은 매우 자의적인 범주다. 다이어에 따르면 피부색 구분이란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누가 (보편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고 제외될 것인가를 통치하는 수단”일 뿐이다. 가톨릭의 관점에서 유대인은 흑인이었다. 영국인의 관점에서는 아일랜드인이 흑인이었다. 부르주아에 비해 노동자는 언제나 더 검었다. 다만 백인 여자에 비해 백인 남자는 더 어둡게 묘사되는데, 백인 여자의 가치란 순수함과 그와 연결된 소극적인 태도인 반면에 백인 남자의 가치란 자기 단련으로 획득한 신체성과 진취성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여성들을 희생시킨 애틀랜타 총격의 핵심에도 젠더화된 백인성의 문제가 놓여 있다. 가해자는 기독교의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백인 남성으로서 자신의 성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하얗지 않은’ 여성들을 타락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백인성의 판타지에 기댄 인종차별이 어떻게 아시아 여성을 성애화하고 열악한 노동의 자리로 내모는가에 대한 이해 없이 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이 모든 것과 연결된 채로 흰색은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 이때 흰색의 반대편에는 검은색이 존재한다. 흰색은 진리와 선을, 검은색은 거짓과 악을 상징해왔다. 뉴욕 지하철 동영상에서 흑인의 검은 옷과 아시아인의 하얀 옷의 대비가 그토록 눈에 띄는 것 역시, 우리가 이런 색의 배치와 상징체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이어는 말한다. 백인들은 “‘그냥’ 인간으로 여겨진다”고. 그리고 “‘그냥’ 인간이라는 것보다 더 강력한 지위는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어떤가. 누구를 ‘그냥’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가.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흰색의 판타지’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가.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도 함께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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