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28년, 제갈량(181~234)은 한실(漢室)부흥이라는 숙원을 이루기 위하여 북벌(北伐)에 나선다. 벼르고 별러서 나온 북벌이건만 마속(馬謖,190~228)이란 휘하 장수의 실수로 요충지를 빼앗기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하게 된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속을 처형하는 것으로 첫 번째 북벌은 마무리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연의(三國演義)’ 제96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다(孔明揮淚斬馬謖)’에 실려 있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고사성어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소설 ‘삼국연의’는 다들 워낙 익숙하니 오늘은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서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속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출중한 인물이었다. 다섯 형제들의 자(字)에 모두 ‘상(常)’이 있어서 ‘마씨오상(馬氏五常)’으로 칭송되었는데, 그중 흰 눈썹이 있던 넷째 마량(馬良)이 가장 뛰어나 ‘백미(白眉)’라고 불렸다. 그 동생 마속을 기용하자 유비는 제갈량에게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마속의 말은 실제 능력보다 지나친듯하오. 크게 써서는 안 될 사람이니 그대는 잘 살피도록 하시오.(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때 요란했던 스타 지식인들이 떠올랐고, 또 한편으로는 유비가 다시 보였다. 중국말에 “아비만큼 자식을 아는 사람이 없고, 임금만큼 신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표현이 있다. 불행히도 제갈량은 유비의 충고를 흘려들었고 마속을 늘 곁에 두었다. 결국 제갈량의 각별한 총애가 도리어 큰일을 그르치게 만든 셈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마속을 기용한 것은 분명 제갈량의 실책이며, 결론적으로 제갈량의 군사 재능도 후한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제갈량전’에도 다음 같은 평가가 있다. “병법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應變將略, 非其所長歟)”
하루는 어떤 이가 마속이 죽은 것이 애석하다고 하자 제갈량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손자(孫子)가 천하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법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었소. 지금 천하가 갈라져 있어 통일을 위한 전쟁을 시작하는 마당에 군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역적을 토벌할 수 있겠소?”
공인(公人)이기에 결단했지만 범인(凡人)이기에 괴로워했다. 친히 마속의 제사를 지내주고 유가족의 생계를 보살폈다는 기록에서는 제갈량의 인간적 고통이 더욱 느껴진다. 54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과로와 켜켜이 쌓인 상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적을 토벌하고 통일을 이루려면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었지만, 그도 내면의 상처에 신음하는 인간이었다. ‘삼국지’는 그런 제갈량을 “모두가 두려워했지만 모두가 사랑했고, 공평하고 원칙이 분명했기 때문에 엄격해도 원망하지 않았다(邦域之內, 咸畏而愛之, 刑政雖峻而無怨者, 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고 증언해준다.
우리 시대의 공직자들을 제갈량에게 비추어 보았다. 누가 봐도 비리이고 탈법인데, 개인적 친분에 얽매여 감싸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묘한 말로 둘러대는 자는 죄가 가벼워도 반드시 죽였다(游辭巧飾者雖輕必戮)”는 제갈량과는 천양지차다. 그저 내 편과 네 편을 가를 뿐이다.
시정잡배들이 그런 작태를 벌인다면 그 피해가 미미할 수도 있겠지만, 국록을 먹는 자들이 사사로운 인정을 앞세워 법과 공의를 외면하면 나라에 끼칠 해악은 가늠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하여 ‘읍참마속’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제갈량도 그 누구도 아닌, 오직 깨어있는 우리 국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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