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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폭탄에 염산·황산까지… 테러리스트 방불케 하는 스토커들

입력
2021.04.12 04:30
수정
2021.04.12 07:5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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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극악해지는 스토킹 범죄

편집자주

‘묻지마 범죄’라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상 범죄’가 늘고 있다. 범행 동기는 물론 방식과 대상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괴기한 범죄들이다. 이상 범죄 증가는 결국 우리 사회가 이상 사회로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경고다. 한국일보는 ‘신(新) 이상 범죄의 습격’ 연재를 통해 사회적·심리학적 부검을 시도한다. 범죄를 막을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깨진 유리창. 기사 속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깨진 유리창. 기사 속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펑! 펑!'

지난해 10월 17일 저녁, 고요하던 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한 아파트에서 짧지만 강렬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은 아수라장이 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육중한 엘리베이터문과 방화문이 훼손됐고, 계단실 유리창이 깨져 바닥에 유리 조각이 나뒹굴었다. 출동한 경찰이 현장을 살펴보니, 3층 계단에서 폭발물로 추정되는 물체의 잔해가 발견됐다.

피의자는 현장에서 큰 부상을 입고 고통을 호소하던 정모(28)씨. 폐쇄회로(CC)TV 확인 결과, 범행 당일 아파트 엘리베이터 부근에서 서성거리던 정씨는 한 주민을 마주친 뒤 계단을 뛰어오르더니 은박지에 싸인 폭발물을 터뜨렸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이 없었지만 정씨는 손가락이 절단되고 고막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사건의 발단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씨는 중학교 동창인 여성 A씨에게 2016년 9월 교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1년 가까이 전화와 문자로 A씨에게 만남을 요구했고, 이를 말리는 A씨 아버지에게도 교제 허락을 강요했다고 한다. 정씨의 비행이 계속되자 가족은 경찰에 신고했고 A씨는 경찰이 제공한 비상신고용 팔찌를 착용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의 스토킹 행각은 참다 못한 A씨가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서 잠잠해지는 듯했다.

스토킹 관련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

스토킹 관련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정씨는 비뚤어진 애정을 거둘 줄 몰랐다. A씨와 연락이 끊긴 지 3년 만인 지난해 초 흥신소를 통해 A씨 주소지와 연락처를 확보한 것이다. 범행 전날 보낸 '만나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성 문자마저 답을 얻지 못하자, 정씨는 분노에 휩싸여 A씨와 자기 자신 모두를 해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A씨와 연락이 두절된 직후부터 3년간 동영상 웹사이트를 뒤져 '폭탄 제조법'을 익힌 터였다.

정씨는 동영상에서 본 대로 인터넷 쇼핑몰과 편의점 등에서 쇠구슬, 종이컵, 과산화수소, 은박지를 사들인 뒤 이를 조합해 폭발물 3개를 제작했다. 아파트 공동현관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를 깨부술 생각으로 여러 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범행 당일 정씨는 아파트 현관을 무사통과해 A씨 집 초인종을 눌렀다가 인기척이 없자 저녁까지 기다렸다. 그러다가 A씨 아버지에게 발각된 그는 A씨 가족이 경찰에 신고하자 비상계단으로 도망치면서 라이터로 폭발물 심지에 불을 붙였다. 폭발물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지고 안에 있던 쇠구슬이 사방에 튀면서 정씨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정씨의 막무가내식 집착과 치밀한 범행 계획은 법원의 실형 선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폭발물 사용, 특수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전주지법은 지난달 17일 "범행의 동기, 경위, 방법, 위험성 등에 비춰 봤을 때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며 정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해마다 느는 스토킹, 수법도 잔혹해져

스토킹(지속적 괴롭힘) 범죄 검거 건수. 그래픽=강준구 기자

스토킹(지속적 괴롭힘) 범죄 검거 건수. 그래픽=강준구 기자

만나주지 않는다거나 헤어지자 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스토킹 범죄는 날이 갈수록 극악해지는 추세다. 정씨의 사제 폭발물처럼 위험 도구를 동원해 협박을 일삼는가 하면, '노원 세 모녀 사건' 피의자 김태현(25)처럼 스토킹 상대뿐 아니라 친지까지 해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으로 분류될 수 있는 '지속적 괴롭힘' 등의 범죄는 해마다 늘어 2013년(312건)과 2019년(583건) 건수는 거의 2배 차이가 난다.

지난해 12월 서울 도봉구에서도 아찔한 스토킹 사건이 발생했다. 75세 남성 편모씨가 B(39)씨가 일하는 식당에 찾아가 염산을 뿌린 것. 두 사람은 다른 식당에서 함께 일하며 알게 된 사이로, 편씨는 사건 발생 수개월 전부터 '만나자' '성관계를 하자'는 등 일방적 요구를 해왔다. B씨가 거부하자 편씨는 B씨가 일하는 식당 앞에서 1인시위를 하거나 식당 손님들을 상대로 B씨에 대한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등 괴롭힘을 일삼은 것으로 전해졌다. 편씨는 현재 특수상해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편씨의 경우처럼 염산, 황산 등 맹독성 화학물질을 이용한 스토킹 범죄는 최근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2016년에는 스토킹 사실이 드러나 권고사직 당한 양모(47)씨가 전 여자친구에게 염산을 뿌려 중상을 입혔다. 이듬해엔 대형백화점 직원(30)이 연락을 차단하자 전 여자친구(39)가 그에게 청소용 염산을 뿌린 사건이 발생했다.

즉각적인 위협은 아니더라도 엽기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스토킹도 꾸준히 일어난다. 부산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김모씨는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동료 대학원생 C씨를 상대로 최음제, 변비약, 심지어 자신의 정액을 넣은 커피를 건넸다. 학술대회 참석차 방문한 호텔에서는 베란다 벽을 타고 넘어가 C씨의 속옷을 훔치려고도 했다. 2018년 4월부터 10개월간 지속된 스토킹 행각은 김씨가 자신의 범행 내역을 적은 메모장을 다른 동료가 보면서 발각됐다. 김씨는 상해미수 및 폭행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본인도 다칠 각오… 강력범죄 확률 높아"

서울 노원구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태현이 9일 오전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도봉경찰서에서 나오다 무릎을 꿇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노원구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태현이 9일 오전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도봉경찰서에서 나오다 무릎을 꿇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토킹 범죄에 폭발물, 화학물질과 같은 치명적 범행 수단이 동원되는 이유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려는 가해자의 반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스토킹 가해자들은 집착과 의심 등으로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며 "큰 복수심을 기반으로 상대를 해하기 때문에 '테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상처를 입히는 범행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스토킹이 장기화할 경우엔 가해자가 자신도 다칠 것을 각오하고 피해자를 해치려는 심리가 작동하면서 강력범죄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정씨는 범행 도구로 폭발물을 선택하면서 본인도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라며 "스토킹 가해자의 경우 '너 없이 나는 의미가 없다'는 극단적 생각으로 범행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태현이 세 모녀를 살해하고 자해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인터넷 발달로 정보 접근성이 급속히 향상되면서 피해자의 연락처나 거주지 정보는 물론, 범행 도구를 구입하거나 직접 만드는 방법도 터득할 수 있어 스토킹 행태가 더욱 극단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 등이 발달해 정보를 습득하기 쉬워졌다는 점도 스토킹의 강력범죄화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동안 경범죄로 취급되던 스토킹 범죄의 처벌 수준을 강화하는 '스토킹 처벌법'이 최근 제정돼 9월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법적 보완을 통해 보호망을 지속적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는 시각이 많다. 이수정 교수는 "피해자의 친족뿐만 아니라 지인, 담당 경찰 등 주변인으로까지 보호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청 관계자도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되면 접근금지 등 긴급응급조치를 할 수 있지만 경찰, 검찰, 법원을 거쳐야 하는 승인 절차가 있어 조치가 지체될 가능성이 있다"며 "법 제정 후 지속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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