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양성관 가정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응급실을 한 번이라도 돈 인턴이라면 홍순자(가명)씨를 알고 있었다. 간경화를 앓고 있던 그녀는 복수를 빼러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응급실에 왔는데, 꼭 자주 와서만은 아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외모와 독특한 말투, 거기에 체취까지. 그 모든 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었다.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선생님, 나 좀 살려줘, 나 죽겠어.”
50대 초반의 그녀는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면 아무나 잡고 늘어졌다. 키는 150㎝가 겨우 넘을까, 얼굴과 몸은 늘 부어있었다.
눈과 입 모두 크고 뚜렷했다. 젊을 때는 선 굵은 미인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과한 화장 때문에 눈과 입이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분칠한 얼굴은 새하얬고, 문신을 한 눈썹은 검었고, 립스틱을 칠한 두꺼운 입술은 새빨겠다. 그녀의 몸에선 항상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그녀는 십수 번이나 배가 불러 숨이 찬 상태로 응급실로 왔지만, 단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 온 적이 없었다. 의사들 중 누구도 그녀의 맨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그날, 그녀는 자신의 성과 같은 레드 코트로 몸을 감싸고 왔다. 붉은 립스틱이 눈을 찌르고, 짙은 화장품 냄새가 코를 쏘았다.
"홍순자님,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선생님, 나 좀 살려줘. 배가 불러 죽겠어. 숨도 차고."
그녀는 아이처럼 내 가운에 매달렸지만, 솔직히 나는 살릴 수 없었다. 그녀를 살릴 수 있는 건 의사가 아니라, 정상적인 간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간을 이식해줄 가족이나 친지, 친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병원에 올 때 늘 혼자였다.
인턴인 나는 내과 전공의에게 전화를 했다. 내과 2년 차 전공의도 홍순자씨를 알고 있었다.
"아, 그 환자? 피검사하고 복수 천자(복수 빼내는 작업) 준비해주세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는 수처 세트와 18게이지 주사기, 복수를 받을 빈 생리식염수통 외에 반창고 등 천자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자, 많이 해 보셨죠? 배 올리세요."
화장으로 얼굴은 가릴 수 있었지만, 배는 감출 수 없었다. 물풍선처럼 부풀어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배에, 말라비틀어진 팔다리가 앙상하게 붙어 있었다. 하얗고 붉고 검은 얼굴과 다르게 몸은 간경화 말기 환자 특유의 황달색을 띠고 있었다. 간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가 군데군데 배를 뚫고 나왔다.
말투와 진한 화장, 그리고 알코올성 간경화. 그녀는 자기 직업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응급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일하던 부산대학교 병원은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 뛰어놀 정도로 아름답다는 천마산의 북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에는 요즘 관광지로 각광받는 감천문화마을이, 동쪽에는 완월동이 있었다. 감천문화마을이 뜬 건 약 10년 전이었지만, 완월동은 부산대 병원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완월동은 오랜 세월 '붉은 등'(홍등)이 꺼지지 않던 곳이다. 일제는 개항 이후부터 산재해있던 유곽들을 모아 녹정(綠町·미도리마치)이란 집창촌을 조성했는데, 이는 국내 첫 공창이었다. 해방 후에도 미군들은 이곳을 녹정의 영어식 표현인 green street라고 불렀다. 1970년대 등록된 이곳 성매매 여성은 1,250명, 미등록자들까지 합치면 약 2,000명에 달했다. 주민 요구로 1982년 완월동에서 충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4년 성매매 단속특별법 시행으로 급속도로 쇠락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이곳은 완월동으로 남아 있다.
완월동은 정면으로 부산 바다와 영도를 마주 보았다. 검은 밤바다에 달빛이 내려앉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완월(玩月), 즉 달을 희롱하는 동네란 뜻이 더 실감났다. 오랜 세월 이곳에서 술 취한 남자들은 달 대신 여자를 희롱했다.
홍순자씨는 말하지 않았고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완월동에 꽤 오랜 세월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흘러흘러 이곳까지 왔을 수도 있다. 술 때문에 이렇게 몸이 상했지만 그래도 유일한 벗이 술 아니었을까. 술은 그의 망가진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휑한 마음도 데워 주었을 것이다. 술이 아니라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부푼 그의 배에서 나온 복수가 커다란 페트병 두 개를 가득 채웠다.
"아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는 복수 천자가 끝나고, 그의 간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알부민이 든 작은 링거를 하나 맞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봐요."
과연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그의 상태로 봤을 때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액을 다 맞은 그녀는 휘청휘청 걸어 나갔다. 붉은 응급실 문이 열리자, 바다의 짠내와 동시에 찬 바람이 넘실대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 밤바다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그래요. 다음에 꼭 봐요.’
응급실 인턴이 끝나고,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10년이 흘렀고 나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는 지금 살아있을까. 간이식을 받았다면 모를까, 그에겐 그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살아있다면 다행이련만, 만약 세상을 떠났다면 가는 길에 누가 배웅이라도 했을지, 그렇게 좋아하던 술 한 잔이라도 뿌려줬을지. 가끔은 그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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