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자바 결혼식 풍경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종교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조화, 인도네시아 청춘의 혼인이 궁금했다. 300여 민족이 사는 인도네시아는 결혼 문화도 그만큼 다양하다. 박물관에 가면 전통 결혼식을 재현한 모형이 민족마다 전시돼 있을 정도다. 독특하고 복잡한 차이를 설명 몇 줄로 헤아릴 수 없다. 현지인들조차 잘 모른다. 직접 보면서 의식 하나하나에 담긴 뜻을 따져 봤다.
찾아간 결혼식은 자바 전통이 가미된 이슬람교 예식이다. 이슬람교 신자와 자바 민족이 2억7,000만 인구의 87%, 40%로 각각 종교, 민족 구성 1위인 걸 감안하면 가장 보편적인 인도네시아 결혼식 풍경이다. 반튼족인 신랑(26)은 민족 전통을 앞세우는 대신 자바족인 신부(26)의 뜻에 따랐다. 자바 혼인식은 보통 이틀간 진행되지만 이번 결혼식은 6시간으로 줄였다. 시간과 비용 절약 등 실리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둘 다 회사원인 신랑 신부는 이날 결혼식을 두 번 치렀다. 먼저 '이자브 카불(ijab kabul)'이라 불리는 이슬람 혼인식이다. 주로 가족만 참석한다. 아랍어로 '받아들일 의무'를 뜻하는 이자브 카불은 자바 전통 의상 베스캅(beskap)과 크바야(kebaya)를 각각 차려 입은 신랑 신부의 등장과 더불어 기도와 이슬람 경전 쿠란 낭독이 이어진다.
주례사가 끝나면 신부 아버지는 신랑에게 딸을 넘겨주고 신랑은 이를 받아들인다는 대답을 해야 한다. 결혼 기도 뒤 신랑 신부가 혼인신고서에 서명하면 부부임이 공식 선언된다. 신랑이 지참금을 건네주고 서로 결혼반지를 끼워준다. 양가 부모의 결혼 생활 조언과 축복 기도로 마무리된다. 꼬박 1시간이 걸린다. 신랑 신부는 1시간 남짓 휴식을 취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어 자바어로 '만남'을 뜻하는 자바 전통 혼인식 '팡기흐(panggih)'가 열린다. 혼인식 전 여러 식물을 세우기(자손 번창), 신랑 신부 씻기기(순결 상징), 원추형으로 쌓아 올린 밥인 툼픙 자르기(번영 상징), 닭 날리기(신랑 신부의 자립 염원) 등의 절차가 있지만 최근엔 생략하는 추세다.
팡기흐는 식장 바깥에 있던 신랑 대표가 안에 있는 신부 부모에게 황금색 종이로 싼 바나나를 전달(피상 상간)하면서 시작된다. 부모의 역할을 다하고 이제 그 의무를 신랑 신부에게 넘긴다는 뜻이다. 결혼을 축하하고 액운을 쫓는 춤을 추는 무동(舞童)을 앞세운 신랑 일행은 안쪽으로, 신부 일행은 바깥쪽으로 전통 음악에 맞춰 한 발짝, 한 발짝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느리고 느린 발걸음이 진중하다.
중앙에서 만난 신랑 신부는 서로에게 시리(베틀후추) 잎을 던진다(발랑안 간탈). '내 마음을 당신에게 드린다'는 의미다. 시리 잎은 사악한 기운을 막아준다는 속설도 있다. 신부는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신랑 주위를 여러 번 돈다(우븡).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품겠다는 뜻이다. 신랑은 출산을 염원하며 신부의 도움으로 날달걀을 밟는다(응이닥 타간). 달걀이 묻은 신랑의 발을 신부가 씻겨 준다.
신부 아버지는 신랑과 신부를 붉은 천으로 한데 두른 뒤 무대로 이끌어 간다. 신부 어머니는 신랑 신부의 등을 뒤에서 밀어준다(신두란). 부부가 화목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지지를 상징한다. 무대 중앙에 먼저 앉은 신부 아버지가 자신의 오른쪽 무릎엔 신랑을, 왼쪽 무릎엔 신부를 앉힌다.
사회자가 신부 아버지에게 묻는다. "시아파 양 팔링 브랏(Siapa yang paling beratㆍ누가 더 무겁나)." 잠시 고민하던 신부 아버지가 답한다. "두아두아냐 사마 사자(Dua-duanya sama sajaㆍ둘 다 똑같다)." 부부는 동등하며 어떤 차이도 없다는 걸 만인에게 공표하는 의식(보보트 팀방)이다. 자바 결혼식에서 유일한 문답이다. 신부 아버지는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신랑은 신부가 들고 있는 주머니에 동전이나 쌀, 씨앗을 붓는다(카차르 쿠추르). 가족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다. 신랑 신부는 평생 돕고 사랑하겠다는 바람으로 서로에게 생수를 먹여 준다(둘랑둘랑안). 양가 부모에게 무릎을 꿇고 축복 기도를 받는다(숭크만). 다시 무동을 앞세우고 신랑 신부와 양가 부모, 온 가족이 줄지어 행진하는 것으로 팡기흐는 끝이 난다. 여러 의식을 생략했는데도 1시간 넘게 걸렸다.
혼인잔치도 한국의 피로연과 조금 다르다. 신랑 신부가 하객들 자리에 찾아가 인사하는 게 아니라 사회자 호명에 따라 하객들이 무대 중앙에 있는 신랑 신부와 양가 부모에게 올라가 차례로 인사하고 덕담한다. 인사를 마친 하객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축하 공연이 진행된다. 혼인식 다음날 혼인잔치를 하기도 한다. 신부는 "지인 결혼식에 초대받아 갔을 때는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는데, 막상 전통 의식에 담긴 뜻을 하나하나 새기면서 결혼식을 하게 되니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했다.
지참금은 금액이 정해져 있지 않다. 최근엔 결혼식 날짜에 맞춰 주는 게 유행이다. 2021년 3월 18일 결혼하면 2,021만318루피아를 주거나 21만318루피아를 주는 식이다. 기도할 때 입는 옷을 주기도 한다. 신혼집은 보통 신랑이, 혼수는 신부가 마련하지만 부부가 절반씩 부담하기도 한다. 혼수 때문에 심하게 다투거나 파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혼식 비용은 기본 5,000만~7,500만 루피아(약 400만~600만 원), 대략 1억~2억 루피아(800만~1,600만 원)가 든다.
만남을 주선하는 결혼정보업체가 있긴 하지만 인기는 없다. 대개 대학, 직장 등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거나 우리나라 소개팅과 비슷한 타아루프(ta'aruf)를 통해 연인이 된다. 축의금은 10만~100만 루피아(약 8,000원~8만 원) 정도 내면 된다.
인도네시아에선 다른 민족끼리의 혼인이 흔해지면서 각 부족의 전통이 뒤섞이고 어우러진 혼합 결혼식도 많이들 한다. 예컨대 혼인식은 자바족, 혼인잔치는 미낭족(서부수마트라) 전통을 따르는 식이다. 각자 전통을 고수하는 양가의 갈등을 피하거나 비용 및 시간을 아끼기 위해 현대식 결혼을 치르는 연인도 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가 좌우명인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가 결혼식에 스며 있는 셈이다.
결혼식 모습은 민족마다, 처지마다 다르지만 혼인의 참뜻은 같다. 그리하여 자바 민족은 신랑 신부의 몸무게를 재는 의식을 혼인식의 가장 중심, 그 절정에 배치했다. '부부는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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