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궐선거에서 우리가 20대 남성의 지지를 잃은 건 페미니즘 때문이다."
12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선거 리뷰 모임에서 나온 말이다. 선거 참패 원인을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진단했는데, 한 남성 의원이 이같이 단정했다고 한다. 이 의원 한 명의 특이한 견해도 아니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선거 패배는 페미니즘이 넘친 탓'이라는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이준석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은 "민주당이 2030세대 남성의 표 결집력을 과소평가하고 여성주의 운동에만 올인해 참패했다"(9일 페이스북)며 논쟁을 부추겼고, 이후 민주당에서 페미니즘을 흘겨 보는 시선이 늘었다.
정말로, 민주당이 페미니즘 때문에 선거에서 참패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당은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실천하거나 정책화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유에 선거 참패 책임을 돌리는 셈이다.
여성 정책 한 게 없는데, 페미니즘 탓?
민주당은 보궐선거 기간 내내 성 평등 의제에 소극적이었다. 박영선 후보 캠프 소속 한 의원은 13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부끄럽지만 관련 공약을 적극적으로 내지 못했다"며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상기시키는 일이 될까 봐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박 후보의 대표 공약인 '서울선언' 10개 중 절반은 '부동산' 관련이었고, 유일한 성 평등 공약인 '여성 부시장제 도입'은 10번째에 겨우 자리했다. △서울시청·공공기관 조직문화 개혁 △채용 성차별 근절 등 성 평등 정책을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박 후보는 유세에서 한 번도 강조하지 않았다.
민주당의 일부 86 인사들은 지지층 결집을 노리고 박 전 시장 성추행 피해자에게 2차 가해 발언도 쏟아냈다.
선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21대 국회 들어 민주당 지도부는 '진보' 정당에 걸맞은 성 평등 정책과 메시지를 내놓은 적이 없다. 174석 슈퍼 여당의 힘을 갖고도 낙태죄 폐지법과 차별금지법 논의를 피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게으른 이유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한 번도 '페미니즘 정당'인 적이 없는데, 페미니즘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모순이다.
"페미니즘으로 분노 자극하는 '비겁한 정치'"
정치권이 페미니즘 탓을 하는 건 손쉽기 때문이다. 2030세대 남성과 여성이 소모적으로 갈등할수록 진짜 책임이 있는 기득권 5060세대는 쏙 빠질 수 있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13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성장과 분배의 공정성을 중시하는 20대가 사회 전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합리적 심판에 나선 것이지, 페미니즘 탓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20대는 사회 구조의 피해자인데, 젠더 이슈로 20대를 분열시켜 상황을 모면해선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정치권 일부의 행태는 20대 남성의 피해의식적 분노를 부추기는 '비겁한 정치 공학'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도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익명을 요청한 한 의원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민주당이 지금처럼 몰아가면 성 평등을 외치는 지극히 정상적인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설 공간이 사라진다"며 "정권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즘 탓으로 축소시키려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또 "20대 여성의 15%가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아닌 제3 후보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매우 아프다"며 "20대 여성의 44%가 그럼에도 민주당을 찍은 것을 감사하는 목소리는 왜 없느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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