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여 년 미 연방의회 풀뿌리 활동가의 눈으로 워싱턴 정치 현장을 전합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뉴욕은 그야말로 깡패정치 그 자체였다. 테러범이 이민자출신임이 드러나자 이민자에 대한 공권력의 횡포는 거의 무법적이었다. 무지막지한 공권력(뉴욕경찰)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려고 소수계 연방급 정치인들이 뉴욕으로 집결하기도 했다. 테러와 무슬림을 동일시하는 여론에 가장 민감하게 쐐기를 박으며 용감하게 시민의 법적인 보호를 외친 이가 램지 클라크(Ramsey Clark)이다.
2007년 연방의회에서는 ‘일본군강제위안부결의안’을 추진하는 일이 미국과 일본 간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국가안보와 관련한 일이라는 이유로 FBI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다. 결의안을 추진하는 한국계 시민활동이 중국의 후진타오 정부와 연관되어 있다는 일본 아베 정부의 문제 제기에 따라, FBI의 특별 수사팀이 뉴욕의 한인사회를 뒤졌다.
결의안 추진을 강행할지 포기할지 고비에서 어느 고령의 흑인 변호사 한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인근의 은퇴한 변호사 그룹에 속해 있던 한 분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램지 클라크가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에 살면서 만들어 낸 민권법률재단 수준의 변호사들 모임이었다. 목적을 설정하고 파고 드는 FBI의 무시무시한 수사에서 무난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권변호사 덕분이었다.
과거 60년 이상 미국 및 세계사, 특히 시민과 인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건에 반드시 등장했던 영향력 있는 미국 변호사 램지 클라크가 지난 9일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 톰 클라크는 미국의 36대 대통령인 린든 존슨의 절친이며 대법관을 지냈다. 톰 클라크의 후임이 미 최초의 흑인 대법관인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 대법관이다. 린든 존슨은 친구 아들인 램지 클라크의 비범함을 알고 그를 텍사스에서 워싱턴으로 불러냈다. 램지 클라크는 케네디 대통령 때에 법무차관, 존슨 대통령 하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다.
램지 클라크는 퇴임 후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다. 반세기 이상 그는 법과 정의를 어기는 미국 정부를 고발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대대적인 베트남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미국 정부를 무시하고 미국의 전쟁범죄를 기록하기 위해 북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때부터 그는 미국의 군국주의의 희생자들을 만나기 위해 전 세계를 방문했다. 미국의 쿠바 봉쇄에 저항하는 뜻으로 쿠바를 수도 없이 방문했다. 1991년과 2003년 중동에서의 미국 전쟁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시위대를 이끌었다. 니카라과의 샌디니스타 혁명과 엘살바도르 해방을 위한 투쟁을 지지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해서 부시 행정부의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19개항의 기소를 썼다. 사담 후세인을 처형하기 위한 재판에서는 후세인을 방어하는 변호팀의 일원이기도 했으며 밀로셰비치, 카다피를 대표하여 일한 경력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겐 그의 삶이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히틀러를 법정에 세워도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붕괴를 냉전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여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램지 클라크는 이것을 미국의 끊임없는 확장 전쟁의 시작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2001년 평양을 방문해서 한국전 당시 미군양민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램지 클라크라는 이름이 한국에 크게 알려지기도 했다.
램지 클라크는 그의 90년 인생을 정의와 인권을 신념으로 그야말로 불꽃같이 불태워 왔다. 소수계 민권활동가들에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가 더 이상 없는 뉴욕시 한복판에 서 허전한 봄날을 맞게 되었다. 램지 클라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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