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묘하게 발전하는 불법촬영
편집자주
‘묻지마 범죄’라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상 범죄’가 늘고 있다. 범행 동기는 물론 방식과 대상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괴기한 범죄들이다. 이상 범죄 증가는 결국 우리 사회가 이상 사회로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경고다. 한국일보는 ‘신(新) 이상 범죄의 습격’ 연재를 통해 사회적·심리학적 부검을 시도한다. 범죄를 막을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9월 19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고화질 카메라가 장착된 드론이 부산 수영구의 아파트 단지 상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600g이 채 안 되는 가벼운 몸체로 캄캄한 하늘을 활보하던 드론은 잠시 후 어떤 집 베란다 앞에 가만히 멈췄다. 집 안의 광경을 몰래 녹화하기 시작한 드론 카메라 너머에는 남녀가 옷을 벗고 애정 행위를 하고 있었다.
드론의 주인은 건너편 건물 옥상에 있는 남성 A(42)씨와 B(30)씨. A씨는 촬영된 영상이 생중계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보면서 능수능란하게 드론을 조작했다. B씨도 영상을 함께 보면서 "카메라 위치를 좀 더 내려라" "다른 방도 찍어 봐라" "저 방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 같다"며 연신 훈수를 뒀다. 이들은 세 시간 동안 드론으로 근처 아파트까지 샅샅이 뒤져 속옷 차림의 남성이 여성을 껴안고 있는 모습과 남녀가 나체로 성관계 하는 장면을 추가로 촬영했다.
야음을 틈탄 이인조의 불법촬영 행각은 드론을 구입한 지 8일째였던 이날 새벽 들통났다. A씨의 조작 실수로 드론이 추락한 것. 아파트 테라스에 떨어진 드론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손에 넘어갔다. 옥상에서 내려와 드론을 찾으려던 A씨가 경찰을 보고 달아났지만, 폐쇄회로(CC)TV 녹화 영상을 확인한 경찰의 추적으로 두 사람 모두 곧 검거됐다. 경찰이 확인한 결과 드론에는 아파트 주민 10쌍의 사생활을 찍은 영상이 담겨 있었다. 부산경찰청은 불법 영상물을 촬영한 혐의(성폭력처벌특례법 위반)로 A씨는 구속, B씨는 불구속 입건해 수사했다.
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촬영 당시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거나 광안리 해변을 촬영하던 중 우연히 아파트 내부가 찍혔다고 진술하며 범행을 부인했다. 그러나 지난 2월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4단독 이덕환 부장판사는 두 사람의 혐의가 인정된다며 A씨에게 징역 8개월을, B씨에겐 벌금 1,000만 원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드론 사용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이런 범죄는 일상생활을 불안하게 하고, 특히 피해자에겐 큰 수치심과 외부 유출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액자, 시계, 차 키… 몰카의 교묘한 둔갑
기상천외한 고공 몰카는 '불법촬영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관련 범죄가 부단히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의 일부분일 뿐이다. 범법자들은 촬영 기기를 교묘하게 숨기거나 드론처럼 단속이 어려운 장비를 동원하는 등 범행 수법을 지능적으로 발전시키는 양상이다.
2019년 제약사 대표의 아들 이모씨는 자신의 집에서 각종 생활용품으로 위장된 카메라로 여성들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여자친구가 화장실 변기 옆에 못 보던 스위치가 설치된 걸 이상하게 여기면서 범행이 들통났는데, 경찰 압수수색 결과 스위치뿐 아니라 액자, 탁상시계, 차 키 등 다양한 물건에서 촬영이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의 외장하드와 USB에서는 7년에 걸친 불법촬영물이 무더기로 발견됐고 피해 여성은 30명을 넘었다. 항의하는 여자친구에게 그는 "단지 취미였을 뿐"이라며 "주변에서도 많이들 (불법촬영을) 한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1심에서 징역 2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다.
지난 8일에는 한 남성이 10년간 여성들과 맺은 성관계 장면을 보조배터리 모양의 소형카메라 등으로 촬영한 것은 물론, 이를 텔레그램을 통해 판매해 왔다는 의혹이 언론 보도로 제기됐다. 해당 남성은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목숨을 끊었지만, 남성과 연계된 또 다른 판매자와 구매자는 잡히지 않았고 불법 동영상은 지금도 여러 경로로 유포되고 있다.
착취물로 고도화되는 불법촬영 범죄
불법촬영 범죄의 고도화는 도구에 한정되지 않는다. 직접 촬영하는 대신 피해자의 약점을 잡아 성적 영상을 얻어내는 '착취물'의 성행이 대표적이다. 본인이 불법촬영죄로 검거될 위험을 피하면서 보다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원하는 영상을 확보하는 악질적 수법이다.
사회적 공분을 자아낸 'n번방 사건'이 그렇다. n번방 운영자들은 여성들에게 '고액의 성접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접근하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해킹해 피해자의 신상정보나 신체 노출 사진을 손에 넣었다. 이후 "주변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며 피해자 스스로 성적 동영상을 찍어 보내게 하고, 이를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입장료를 책정한 텔레그램 단체방을 통해 유포했다. 이런 식으로 성착취물을 제작 유통한 '박사' 조주빈(26)과 '갓갓' 문형욱(25)은 구속 기소돼 1심에서 각각 징역 40년과 징역 34년을 선고받았다.
이상심리와 돈이 결탁된 암시장
성인물 유통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지만, 그 가운데 불법촬영물을 골라 소비하는 이들은 관음증이나 성도착증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불법촬영물 시청과 관음증 성향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이런 성향에 정상적인 이성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상황까지 겹치면, 불법적으로라도 상대를 소유한 것처럼 느끼려는 심리가 발동하기 쉽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불법촬영물을 생산하는 이들 역시 지속적인 자극을 갈구하는 성향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은 "불법촬영을 직접 행하는 과정에서 긴장감과 성취감을 느끼고, 마치 전리품을 모으는 재미처럼 여기게 된다"며 "갈수록 강한 자극을 좇는다는 점에서 행위 중독의 일종"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이상심리에 돈이 결탁되면서 불법촬영물 수요자와 공급자는 음습한 '시장'을 키워나간다. 지난달만 해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회원수 7만 명, 일 방문자 수 3만 명에 육박하는 불법촬영물 사이트를 적발해 수사에 나섰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불법촬영을 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생산업자'로 여기며 영상을 원하는 이들로부터 금전적 이득을 얻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구매자들이 단체방 운영자에게 동조하며 성착취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을 즉각 퇴장시켰던 n번방 사건 사례에서 보듯이, 불법촬영물 유통시장은 끈끈한 '지하공동체'로 변모하기도 한다.
"생산은 물론 소지?시청도 엄벌해야"
불법촬영의 폐해가 커지면서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불법촬영 탐지기를 도입하고 여성 화장실 등 취약 장소에 집중 순찰을 실시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전 국민이 고성능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는 시대에 촬영도구 색출에 초점을 맞춘 현행 단속 방식은 범죄 근절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전문가들은 불법촬영 피해는 인터넷 유포로 극대화되는 만큼, 한정된 단속 역량을 촬영물 유통 차단에 집중하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제언한다. 공정식 교수는 "촬영 기기를 적발한다고 해도 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면 피해 구제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며 "불법촬영물이 온라인상에서 유포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법적 규제를 보다 촘촘히 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지난해 'n번방 방지법'이라 불리는 관련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성착취 영상물 제작·반포죄에 대한 법정형이 종전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에서 '7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상향 시행되고 있다. 또 성착취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가들은 불법촬영물 거래 고리를 차단하려면 소비 행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보다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성착취물을 사거나 보면 처벌받는 조항이 신설됐지만, 현실에서는 피고인의 어린 나이, 반성 등을 참작해 벌금이나 집행유예 처분을 내렸을 뿐 실형이 선고된 사례가 없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불법촬영물 소지 등에 대한 기본 형량을 6개월~1년으로 권고해 처벌 수준이 약한 감이 있다. 이수정 교수는 "경찰이 불법촬영물 공급 사이트를 더 적극적으로 단속해 소지자와 시청자에 대한 증거까지 확보해야 한다"며 "아동청소년법이 개정돼 온라인상 잠입수사도 가능해진 만큼 수사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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