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은 남을 웃기고 스스로 잘 웃는 '좋은 유머감각(GSOH, good sense of humour)'을 반긴다. 영국의 코미디는 1960년대 코미디 그룹인 '몬티 파이슨(Monty Python)'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이들의 영향력은 음악에 있어서의 비틀스와 비교된다), 긴 역사와 작품성으로 나라 안팎에 많은 열광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정치인들도 공개적으로 농담을 잘하는데,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2006년 정계를 떠나는 연설에서 자신을 내조해온 부인에 대해 "옆집 남자(재무장관 고든 브라운을 지칭)와 바람나서 도망을 가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며 고마워한다.
영국인의 유머는 '고차원'의 정치 풍자에서 '저차원'의 몸 개그까지 다양한데, 그 독특한 특징을 몇 가지 논할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코미디들은 현실적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개되는 '관찰(observational)' 코미디인 반면, 영국의 코미디는 현실의 논리와는 다른 기괴한 상황과 인물, 내용을 지닌 '초현실적인(surreal)' 요소가 농후하다. 한국 케이블 방송에서도 '싸이코 빌리지'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2000년대 전후 티비 시트콤 '신사들의 연맹(The League of Gentlemen)'이 그 예다.
영국 유머의 또 다른 특징은 어두운 사회문제를 코믹하게 그려내는 '무게와 재미의 공존'이다. 한때 산업이 번성하던 도시 셰필드에서 더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6명의 철강업 노동자들이 실업의 고통을 남성 스트립쇼로 승화한다는 내용의 영화 '풀 몬티(The Full Monty, 1997)'는, 심각함 속에 웃음을 찾는 영국 특유의 유머감각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1971)'는 끔찍한 범죄자의 정신 개조라는 묵직한 주제가 주인공의 천연덕스러운 해설과 팽팽하게 공존하는 걸작이다.
무거운 사회문제에서 웃음을 찾는 영국인들은 더 나아가 '금기사항'으로 여겨지는 소재들까지 다룬다. 살인과 죽음을 재미있는 듯 그려내는 영화 '브뤼헤에서(In Bruges, 2008)', 영국의 독설적인 코미디언 사샤 배런 코헨이 직접 동성애 연기를 하면서 일반인들의 반응을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담아낸 영화 '브루노(Bruno, 2009)' 등이 그 예라 하겠다. 이런 이유로, 영국인의 유머는 종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politically incorrect)'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얼마 전에 작고한 에든버러 공(현재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도 평소 유머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1986년 중국 방문 시에는 영국 유학생들에게 그곳에 오래 머물면 '찢어진 눈(slitty-eyed)'이 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회적 약자나 인종 등을 소재로 한 유머는 그다지 많이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다. 영국인들이 소재의 제한 없이 유머를 즐겨왔던 것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큰 격변과 상처 없이 일찍부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런 기틀 속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누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자부심을 가진 영국인들에게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콧대 높다(snobbish)'고 농담을 한 것은 그들의 유머감각에 걸맞은 수상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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