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딸 결혼식만 마치고 수술받을게요" 후두암 아버지는 끝내…

입력
2021.05.11 21:00
수정
2021.06.02 14:40
25면
0 0

<11> 이낙준 이비인후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의사가 교과서대로만, 배운대로만 치료하는 건 아니다. 다들 습관이나 강박 같은 것이 있다. 나도 그렇다. 그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 환자의 경험에서 시작됐다

그 환자를 만난 건 레지던트 1년 차 때였다.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빅5’라고 불리는 대형병원으로 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환경을 포함해 워낙 많은 것들이 변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내가 생각했던 이비인후과와, 실제 겪게 된 이비인후과 의국 생활의 괴리였다. 중이염이나 축농증 그리고 비염 정도를 보겠거니 했던 나의 예상은 첫날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병동 도처에 암환자들이 있었다.

내가 전공하기로 한 학문의 정식 명칭은 이비인후-두경부외과였다. 얼굴과 목 전체에 발생하는 암은 다 우리과에서 봤다. 그래서인지 두경부외과는 병동도 암센터에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따라 들어간 교수님 외래에는 정말로 다양한 환자가 다 왔다. 가볍게는 갑상샘암부터 설암, 편도암, 비강암까지. 얼굴과 목에 이토록 많은 암이 있었는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두경부외과 생활이 몇 달 지났을 무렵, 교수님 외래에 신사 한 분이 들어왔다. 쉰 목소리 말고는 다른 어떤 이상도 보이지 않는,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의 목에는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었다. 크기도 작지 않았다. 교수님은 단호하게 얘기했다.

"후두암입니다. 당장 수술하셔야 합니다."

수술하면 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통 수술이 아니었다. 후두 전절제술. 후두 전체를 잘라내는 수술이다. 그렇게 되면 환자는 두 번 다시 성대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코나 입으로 숨쉴 수도 없어 목에 난 구멍을 통해 호흡해야만 한다.

그 신사는 머뭇거렸다.

"선생님, 딱 두 달만 수술을 미룰 수 없을까요? 딸아이 결혼식이 있습니다."

환자의 말에 교수님은 침음(沈吟)을 흘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딸 결혼식이 있다고 하지 않나. 상견례도 해야 하고, 하객들 인사도 받고, 신부입장도 같이 해야 할 텐데. 고작 두 달 아닌가. 그때까지 수술 좀 미룬다고 환자가 어떻게 되지는 않는 거 아닌가.

환자는 마음을 이미 정한 듯했다. 교수님은 만류했지만 한사코 뿌리쳤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먹힐 거 같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환자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후, 그 환자가 병원에 찾아왔다.

"암이 식도까지 번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행해 있었다. 그는 인상조차 변해, 누가봐도 죽음이 임박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두 달 전, 왜 그를 말리지 않았을까. 나도 적극적으로 수술을 권했다면 결과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교수님 말조차 뿌리치고 갔는데 레지던트 1년 차가 붙잡는다고 그가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죄책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이고 휴일이고 매일 병원에 나가 입원한 그 환자를 마주했다. 하루에 30분이 됐든, 1시간이 됐든, 어떻게든 그의 얼굴이라도 봐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수술 후 상황은 참담했다. 후두 전절제술에 더해 식도까지 잘라낸 그 환자는 입 안의 침을 받아내기 위해 입에서 목 쪽으로 뚫린 구멍으로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어 화이트 보드로 겨우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의미 있는 소통은 불가능했다. 대개는 아파, 힘들어, 같은 단편적인 단어들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쓴 문장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평생 그 문장을 잊을 수 없다.

‘이제 그만 죽고 싶어요.’

그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내게 어딘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쓴 화이트 보드를 내밀었다. 그리곤 곧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후 찾아간 그의 장례식장에서 고인과 많이,참 많이 닮은 여성을 볼 수 있었다. 딸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본인 결혼식 때문에 수술타이밍을 놓쳤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그 장례식장에서 나는 의사로서 치료의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수술하셔야 합니다."

그때부터일 거다. 내가 유독 암환자들에게, 심지어 내 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수술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 것은.

이제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아이들이 생겼다. 문득문득 그 환자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아버지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결혼식보다 더 소중한 자리가 있을까. 설령 내 생명이 곧 다한다 해도 애지중지 키운 딸의 손을 잡고 웨딩마치에 맞춰 걸어가고 싶은 것,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면서 행복해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 그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 아닐까. 수술을 마다한 그 환자가 한없이 안타깝다가도, 딸의 결혼식을 앞둔 아버지로서의 그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의사다. 그 어떤 경우라도 환자에게 치료의 기회를 놓치는 위험을 감수해도 된다고 말해선 안 된다. 적어도 의사에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대한이비인후과학회 홍보위원

대한이비인후과학회 홍보위원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인이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