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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영혼에 보이지 않는 약을 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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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영혼에 보이지 않는 약을 주셨죠

입력
2021.04.28 17:00
수정
2021.04.28 19:1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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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의 정진석 추기경 추모의 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이 27일 선종했다. 향년 90세. 사진은 지난 2012년 6월 15일 명동대성당에서 이임 감사 미사를 봉헌한 후 신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당을 나서는 정진석 추기경의 모습. 연합뉴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이 27일 선종했다. 향년 90세. 사진은 지난 2012년 6월 15일 명동대성당에서 이임 감사 미사를 봉헌한 후 신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당을 나서는 정진석 추기경의 모습. 연합뉴스

정진석 추기경님.

이렇게 가시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종일 날씨는 흐렸습니다. 해가 먼저 알았을까요. 자신의 존재를 가리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주교 50주년 기념으로 혜화동 주교실에서 뵌 그 두어 시간의 기억을 저는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의 선물을 받았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때만 해도 건강은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병원으로 가시는 걸 알았지만 그냥 가볍게 다녀 오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열정 어린 말씀이 이어졌고 힘이 있었습니다. 느리고 부드러웠지만 힘이 있는 그 말씀의 운(韻)이 하느님께로 기울어지면서 더 큰 기운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저같이 우둔한 사람마저도 그 울림에 공존하듯 성령을 경험하는 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 옆에서 그 기이하고도 뿌듯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신달자 시인. 민음사 제공

신달자 시인. 민음사 제공


그것은 제가 지금껏 가슴 한복판에 아끼면서 누리는 힘의 신비입니다.

일상에서 조율되지 못하는 감정들로 뒤뚱거릴 때도 내 시선은 내 가슴속에 간직한 그 신비를 느끼고 바라보는 조율할 수 있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위협적이지도 않으면서 복종시키지도 않으면서 저를 다스리는 손길을 분명 느끼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저에게 주신 큰 선물이었습니다. 제 생에 큰 기적이기도 하였습니다.

추기경님은 마치 하느님이 예수라는 한 아이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서 결국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게 하시고 다시 부활이란 이름으로 되돌려 놓는 신비의 극치 거기쯤에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위험에서 살아 오시고 수많은 생명의 말씀을 번역 또한 쓰시면서 하느님의 실존을 알리려는 데 일생을 바치신 추기경님이 아닙니까.

그래서 추기경님의 그 부드럽고 느리지만 확신에 찬 그 운(韻)의 말씀들은 치유력이 강했습니다.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치유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날 혜화동에 갈 무렵 저는 약이 필요했습니다. 날마다 먹는 너무 과다하게 먹는 약이 아니라 정신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약이 필요했지요. 늙어서 오는 힘겨움과 많은 포기 그리고 수명을 감지해야만 하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약을 구했으면 했던 터였습니다. 어지러웠고 비틀거렸습니다. 고요한데 시끄럽고 누웠는데 불안했지요. 스스로 무력감에 어깨가 아팠습니다. 추기경님과 인터뷰하고 돌아왔을 때 벌써 혜화동 골목에서부터 발걸음에 확신의 힘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추기경님이 보이지 않는 약을 주신 게 틀림없었습니다. 편안하게 온전히 맡기면 다 편안해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종교와 단절되어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면 그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어찌 제가 바로 설 수나 있었겠습니까. 내 인생은 생기도 힘도 광휘도 균형도 감동도 위로도 만족도 모르는 기이한 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저같이 잘 흔들리는 인간에게 말입니다. 내 인생은 내것이라고 주장했던 비신자 때의 고집과 오만을 정면으로 뒤집는 일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나'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사랑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었습니다. 특히 감사한 일은 제가 '감사하는 일'에 길들여 사는 일입니다. 추기경님 제가 추기경님을 그리워하는 일은 제 인생을 바로 세우고 더불어 사는 모든 이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생을 산다는 일일 것입니다. 이 또한 추기경님이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우물쭈물, 대충의 자기식 신앙이 아니라 흡족하게 내어 맡기며 듣고 보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묵상하며 살겠습니다. 발명가를 꿈꾸던 공대생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신 것은 다 하늘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말씀의 전수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몇 번이고 위험에서 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추기경님은 하늘의 그릇입니다. 주님이 만들어 우리 앞에 보내신 행동의 그릇, 말씀의 그릇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추기경님 그리운 추기경님. 제가 바르게 추기경님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제 복병인 불평 불만을 쓸어내고 속으로 들끓는 모든 잡음의 걱정을 참된 기도로 모으며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삶 먼지를 쓸어 담는 광주리로 사신 추기경님 지금 당장 뵐 수는 없어도 하늘나라의 평온 그 한가운데 계실 것을 믿습니다. 하늘 그리고 구름에서 빛나는 별빛에서 햇살에서 언제나 그 순정한 미소를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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