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패스트푸드 거인 ‘맥도날드’의 탄생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격주 토요일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신속함이 생명이죠. 맥도날드의 모든 햄버거는 그릴에서 시작해요. 그릴만 담당하는 조리원 두 명이 순쇠고기 패티를 완벽하게 구워냅니다. 그렇게 패티가 구워지는 동안 다른 조리원들이 빵을 준비하죠. 모든 맥도날드 햄버거에는 피클 두 조각, 양파 약간, 그리고 정확한 양의 케첩과 머스터드가 들어갑니다.”
“케첩과 머스터드를 쏘는 총은 어디에서 구한 겁니까?”
“우리가 만들었어요.”
“만들었다고요?”
“주방 전체를 주문 제작했습니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주방에서 덩치가 큰 남자는 잰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최종 조리대에서 모든 걸 하나로 합치면 짠! 따끈하고 맛있는 햄버거가 나옵니다. 단 30초 만에 그릴에서 손님의 손으로 전달돼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요?”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같이 한 거죠. 동생 딕 맥도날드예요.”
이름을 입에 담자 덩치가 작은 남자가 등장한다.
“안녕하세요? 딕입니다.”
레이 크록(1902~1984)은 일궈낸 게 없는 세일즈맨이었다. 피아노부터 밀크셰이크 제조기까지 온갖 물건을 팔러 전미 방방곡곡을 누볐지만 대박은커녕 중박도 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갔다. 그렇게 쉰 넷이 된 1954년, 그는 사무실과 통화 중에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캘리포니아주 샌버나디노의 한 햄버거 가게에서 밀크셰이크 제조기를 하나둘도 아니고 무려 여섯 대나 주문했다는 내용이었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며 영업을 해도 한 대를 팔기 어려운 판국에 무려 여섯 대라니! 사연이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중부에서 2,200㎞쯤 떨어진 샌버나디노까지 차를 몰고 찾아간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 맥도날드(McDonald’s) 햄버거가 있었다. 대기가 만만치 않게 길었지만 쑥쑥 빠져 크록의 차례가 돌아온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주문하고 값을 치르자 직원이 바로 음식을 건네준다. 이다지도 신속한 처리라니. 놀라운 건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가게 앞 벤치에 걸터앉아 접시도 포크도 없이 종이 봉투에 담긴 햄버거는 따뜻하고도 맛있었다.
“음식은 어떠십니까?”
버거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덩치가 큰 남자가 다가온다.
“여태껏 먹은 햄버거 가운데 최고인데요.”
“기쁨을 드리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저는 맥 맥도날드예요.”
“레이 크록입니다. 근처에 출장 왔다가 궁금해서 들러봤어요. 대단한데요?”
“그렇다면 주방을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평생을 중박 한 번도 제대로 못 쳐보았던 세일즈맨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의 비밀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평생 요식업계에 몸담으며 별의별 식당을 다 가봤지만 이렇게 대단한 곳은 처음이에요. 두 분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형제의 사업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생각이 든 크록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듣는다. 동북부 뉴햄프셔에서 가난에 시달렸던 형제는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고향을 버리고 서부, 할리우드에 정착한다. 일단 영화사 트럭을 몇 년 운전해 작은 마을의 극장을 샀지만 1929년의 대공황 탓에 모든 걸 잃는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모두가 어려운 가운데 유일하게 동네의 햄버거 노점만 돈을 벌어들이는 걸 보고 핫도그 가게를 차려 다시 일어선다. 어려운 상황에서 일궈낸 작은 성공을 발판 삼아, 형제는 좀 더 큰 옆 동네인 샌버나디노로 본거지를 옮긴다. 다만 음식 장사를 계속 이어나가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었다. 마침 형제가 샌버나디노에 재정착한 시기에는 1940년부터 ‘드라이브인(drive-in)’ 식당이 대세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있으면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대체로 여성)이 찾아와 주문도 받고 음식도 가져온다. 방문객은 차에 앉은 그대로 음식을 먹고 식당을 떠날 수 있다. 형제도 이런 콘셉트에 충실한 음식점 ‘맥도날드 페이머스 바비큐(McDonald’s Famous BBQ)’를 개업한다.
새 음식점으로 형제는 바로 대박을 쳤지만 호시절은 길지 않았다. 곧 수익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니, 형제는 궁리 끝에 드라이브인 식당의 태생적인 한계를 깨닫는다. 자동차로 쉽게 도망칠 수 있었으므로 주고객층이 비행청소년이나 폭주족 등이라는 점이 일단 문제였다. 주방부터 자동차까지 거리가 멀다 보니 주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이는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접객 과정에서 접시나 유리잔 등도 깨지기 일쑤였다.
이처럼 쌓인 태생적인 운영의 어려움 사이로 동생인 딕이 큰 발견을 했다. 전체 매출의 87%가 단 세 가지 메뉴 햄버거, 감자튀김, 탄산음료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덜어내자. 형제는 바비큐 식당의 전형적인 메뉴를 전부 덜어낸 뒤, 탄력을 받아 불필요한 요소를 거침없이 쳐내기 시작했다. 종업원을 없애고 현재 햄버거의 표준 포장인 종이로 전환했으며 인테리어 소품까지 전부 들어냈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전부 사소했다. 무엇보다 음식 자체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핵심이었다. 음식이 빨리 나오면 방문객의 회전이 빨라지니 수익도 올라간다. 물론 빨리 나올수록 조리 과정의 생생함을 잃지 않으니 당연히 맛도 더 좋을 것이었다. 그래서 목표로 잡은 시간이 바로 크록에게 자랑한 30초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이었다.
그 30초를 일궈내고자 형제는 주방 시스템을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다시 고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식점의 인력은 기존의 주방 기기와 통상적인 배치에 조리를 비롯한 움직임을 맞춰왔다. 하지만 형제는 이를 거부하고 목표로 삼은 음식과 조리에 맞춰 주방기기를 배치한 뒤 움직임 또한 훈련을 통해 맞춰 나갔다. 옷에 몸을 맞춰 불편하게 움직이던 관행을 타파하고 움직임에 따라 옷을 몸에 맞게 만들어 입는 형국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맥도날드 형제들만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탄생했다. 형제는 포드 자동차의 유동작업(assembly line)을 참고 삼아 시스템을 개발했다. 1913년, 헨리 포드는 혁신적인 유동작업 시스템을 도입해 자동차의 조립 시간을 대폭 줄였다. 원래 자동차 같은 기계류의 조립은 한 사람이 시작부터 끝까지 소화하는 방식이었는데, 포드는 사람을 제자리에 고정시킨 대신 자동차를 움직였다. 그리고 조립공마다 단일 과업을 되풀이하게 만듦으로써 효율을 높였으니, 12시간이 걸리던 자동차 조립을 93분으로 단축시켰다.
맥도날드 형제들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도 같은 개념으로 접근했다. 햄버거는 자동차보다 훨씬 작기에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다만 패티를 굽는 이부터 피클을 얹고 양념을 하는 이까지, 조리과정을 전부 세분화 및 전문화함으로써 햄버거를 단 30초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시스템의 비결까지 알고 나니 크록에게 맥도날드의 미래가 보였다.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이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 프랜차이즈를 통해 매장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겠군.” 그렇게 크록은 형제에게 동업을 제안하지만, 바로 오늘날의 맥도날드가 탄생하지는 않았다. 형제는 무엇보다 품질관리에 민감했으므로 프랜차이즈의 조건을 아주 까다롭게 제약했다. 모든 매장이 자신들이 정해 놓은 조건을 엄수하며 운영하는 한편, 작은 변화라도 반드시 두 사람에게 서면으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밀크셰이크 제조기를 팔듯 맥도날드의 프랜차이즈를 팔고 싶었던 영업사원 크록과 음식을 내는 시간은 줄이더라도 품질만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는 장인정신의 형제. 애초에 둘은 물과 기름처럼 화합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결국 크록이 먼저 움직였다.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달팽이처럼 느린 승인 절차, 그리고 지분이 너무나 적게 떨어지는 원래의 계약까지. 총체적으로 불만을 느낀 그는 형제의 재가 없이 프랜차이즈를 관리 및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꾀한 가장 큰 변화는 부동산의 확보를 통한 수익 모델의 변화였다. 원래 프랜차이즈 사업자가 알아서 필요한 부지 및 건물을 임대하는 형식이었던 것을, 맥도날드가 직접 매입한 부동산을 임대하게끔 시스템을 바꾸었다. 이처럼 부동산을 통제하면서 맥도날드는 지금 우리가 아는 프랜차이즈의 거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던 맥도날드 형제는? 둘의 입지는 크록이 나름의 방식으로 맥도날드를 확장하는 것과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해 쪼그라들어, 종내에는 섬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이름이 붙지만 이제 맥도날드와 자신들과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진 걸 깨달은 형제는 1961년 크록에게 매각을 제안한다. 각자 135만 달러(세후 100만, 현재의 가치로 약 886만 달러, 98억6,000만 원)와 기업 수익의 1%를 영구히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름을 포함한 모든 조건을 내주기로 한 것이다. 크록은 전자는 수락했지만 후자는 구두 계약만 하자고 종용했고, 마지못해 응한 형제는 근거가 남지 않아 자신들의 몫을 챙기지 못했다. 자신들의 이름마저 쓸 수 없게 된 형제는 상호를 바꿔 가게를 계속 운영했지만, 근처에 새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섰다. 결국 형제는 독립한 뒤 6년 만에 폐업했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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