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사건
가이드라인 없고 주먹구구식 대응
<2>모욕을 주는 성교육
편집자주
아이들의 우주는 무한합니다. 여기에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을 더해줘야 할 동화책과 교과서, 애니메이션이 되레 이 세계를 좁히고 기울어지게 만든다면요? 한국일보는 4회에 걸쳐 아동 콘텐츠의 '배신'을 보도합니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어린이 성교육 책들을 살펴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확인했다. 선정적이지 않은 삽화와 수준 높은 내용으로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받은 책은 정치권의 '마녀사냥'을 받고 초등학교에서 퇴출됐는데, 성폭력과 조롱을 일삼는 저질 성교육 책들은 아무런 제재와 논란 없이 유통되고 있어서다.
우선 어린이용 성교육 동화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보자. 남녀의 성관계 과정을 직접 묘사하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썼다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극히 담백한 그림과 함께, 무척 사랑하는 사이인 엄마와 아빠가 아기를 갖고 싶어한다는 등의 설명이 있었지만, 맥락 없이 공격당했다.
2020년 9월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 나다움 어린이책 7종을 두고 선정성과 조기 성애화, 동성애 조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 학부모 단체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를 '포르노 같은 동화책'이라고 했다. 그러자 해당 도서들은 단 하루 만에 전국 초등학교에서 자취를 감췄다. 여성가족부의 어린이 성평등교육문화사업이었던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사건이었다.
나다움 어린이책은 몸의 성장과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다양한 가족 형태와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취지로 자문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됐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덴마크에서 1971년 만들어져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받았고, 해외에서 유아 성교육 자료로 지금도 널리 쓰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허용되지 못했다. 이뿐 아니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는 '가족 인권선언'이나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은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로 묘사한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담은 '엄마는 토끼 아빠는 펭귄 나는 토펭이'는 이종(異種) 간 결합을 미화했다는 황당한 딱지가 붙었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처럼 차분한 삽화와 사실을 설명한 책은 철퇴를 받은 반면, 성적 조롱과 성폭력을 담은 민간 성교육 책은 널리 유통되는 현실. 아동콘텐츠의 가이드라인이 없고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 어린이 콘텐츠는 선정성으로 물들어 있는데, 그나마 여가부가 주도한 나다움 프로젝트에는 비현실적인 엄숙주의를 강요해 아동 성교육 시장은 더욱 길을 잃었다.
초등학생은 성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다. 여가부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10명 중 3명이 음란물을 봤다고 답했으며, 초등학생의 음란물 이용률은 33.8%로 중학생(32.2%)보다 높은 수준으로 2018년(19.6%)보다 대폭 늘어났다. 아이들과 세상은 저만큼 달려 나가는데, 공공 성교육은 지나친 엄숙주의에 묶이고, 민간은 지나친 선정성이 판을 친다.
특히 성폭력 내용을 담은 민간의 도서들은 방치하면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담은 내용은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화 현상도 보인다.
2008년 예림당의 아동·청소년 대상 학습만화 'Why? 사춘기와 성'에는 성소수자라는 놀림을 받아 속상해하는 딸에게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존중하는 자세를 알려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2018년 펴낸 개정판에서는 성소수자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그리는 등 역행했다.
출판사 측은 보수 기독교계 등의 항의가 있어 고쳤다고 해명했고,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감수를 받아 재수정한 상태다. 예림당 측은 "문제가 된 부분뿐 아니라 지난해 이화여대 학생들이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다고 지적한 내용 역시 고쳤다"면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미디어는 산업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을 보장하는 등의 공적 책무가 있다"며 "여가부가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를 결정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로 정부가 다양성 재현을 지원하지 않으면 산업 논리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글 싣는 순서> 뒤로가는 아동콘텐츠
<1>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다
<2> 모욕을 주는 성교육
<3> 재미로 포장된 외모비하
<4> 차별 없는 아동콘텐츠를 위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