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택한 결정" 지구촌 환영에도
WTO 지재권 변경 논의에 진통 예상
제약사들 "동기부여 약화" 거센 반발
이제 가난한 나라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물리칠 무기를 갖게 될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백신 지식재산권(지재권) 면제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감염병 종식에 ‘파란불’이 켜졌다. 개도국이 특허료에 구애받지 않고 복제 백신을 대량 생산해 공급하면 그만큼 집단면역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 무역대표부(USTR)도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에선 특별한 조치를 요구한다”며 힘을 실었다. ‘백신 공정 분배’를 위한 연대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다. 물론 우려가 없진 않다. 당장 제약사들의 거센 반발부터 각 나라의 동의를 구하는 일까지 걸림돌이 한둘이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인류를 택했다”
미 행정부의 결정은 미국이 백신을 쌓아두고도 다른 나라를 돕지 않는다는 비난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나왔다. 60%에 육박하는 미국의 백신 접종률과 대조적으로 인도와 브라질 등 개도국들에선 코로나19 사태가 급격히 악화해 압박이 한층 가중됐다. 바이든 대통령 스스로도 백신 기술 공유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터라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백악관은 수주간 회의 끝에 전날 가까스로 지재권 면제 찬성에 뜻을 모았다. 캐서린 타이 USTR 대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프 지엔츠 코로나19 대응 조정관 등이 동의했다고 한다.
지구촌은 즉각 환영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역사적인 결정이자 기념비적인 순간”이라고 치켜세웠다. CNN방송은 “전 세계인이 모두 백신을 맞기 전까지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궁극적으로 미국에도 이로운 결정”이라고 평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결국 인류를 택했다”는 극찬도 곁들였다.
WTO 협상 진통 예상… 수년 걸릴 수도
공은 이제 세계무역기구(WTO)로 넘어왔다. 백신의 각종 성분과 제조 기술 등 WTO의 보호를 받는 특허권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데다 지재권 면제 범위와 기간을 어떻게 정할지 등 넘어야 할 산이 수두룩하다. 지재권 규정을 바꾸려면 WTO 164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동의도 필요하다. 유럽연합(EU)과 영국, 스위스, 일본 등은 처음부터 반대해 왔다. 합의에 다다르기까지 최소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지난한 진통을 겪을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앞장서 WTO에 백신 지재권 일시 면제를 요구한 게 지난해 10월이었고 최근 100여 개 회원국이 합세하면서 논의가 본격화됐다. 다행히 5일 비공개로 열린 WTO 일반이사회에서 공정한 백신 분배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도 “백신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ㆍ경제적 문제”라며 다자간 협력을 촉구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국이 전향적 태도로 돌아선 만큼 WTO 논의가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 한 유럽 외교관은 “미국의 입장 변화는 반대 국가들에 확실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말했다.
제약사 반대·기술 격차 돌파할까
합의도 합의지만 최대 난관은 역시 제약사들의 거센 반발이다. 국제제약협회연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지재권 면제는) 복잡한 문제의 단순하지만 틀린 해답”이라고 맹비난했다. 지재권 포기가 향후 의약품 개발의 동기부여를 약화시킬 거라는 비판도 여전하다.
제약사들이 백번 양보한다 해서 즉각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력과 장비, 인력이 필요하다. 개도국에 인프라를 갖추는 일부터 장애물이다. 일례로 화이자 백신은 19개국 86개 업체가 공급하는 280개 원료로 만들어지는데 빈국이 이를 원활하게 조달하기란 쉽지 않다. 미셸 맥머리 히스 미국바이오협회 최고경영자(CEO)는 “원료, 장비, 인력이 없는데 지재권만 주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차라리 미국을 ‘백신 무기고’로 만드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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