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웃는 가짜농부, 우는 진짜농부
농지 사들인 '가짜농부' 투자금 회수·세감면 위해?
임대차 계약 안하고 임차료 인상 '진짜농부' 행세??
농민들, 직불금 뺏기고 화학비료 남용 농지 파괴?
세종·안성 투기지구도 비슷… 부재지주만 배불려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농지에 빠진 공복들’ 기획을 통해 고위공무원들의 농지 소유 실태를 조명합니다. 경자유전 원칙과 식량 주권을 위해 국가가 보호하는 토지인 농지가 고위공직자들에겐 투기 대상일 뿐이었다는 현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농민들이 피해를 본사연 등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서 야채농사를 해온 '임차농' 강창부(가명ㆍ46)씨는 평생을 성산읍에서 살아온 제주 토박이다. 지척에 자리 잡은 성산일출봉에서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걸 일상으로 여겼던 강씨는 최근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준비를 하고 있다. 평(3.3㎡)당 500~1,000원이었던 농지임대료가 수년 전부터 2,000원으로 뛰더니 현재는 3,000원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임대료가 세 배나 뛰다 보니 강씨가 손에 쥐는 수입도 3분의 1로 감소했다. 강씨는 “임대료가 저렴한 제주의 다른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농지은행에 문의해도 임차할 땅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며 “평생 할 줄 아는 건 농사일밖에 없어 육지로 건너가 농사일을 이어가야 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농지 투기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농지 투기 의혹을 폭로했던 참여연대의 비유처럼 농지는 투기노름판의 가장 유용한 패로 자리 잡았다. 아파트와 대지 등 다른 부동산에 비해 훨씬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어, 개발에 따른 보상이나 시세 차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농지가 본연의 기능을 잃고 투기판의 유용한 패로 쓰이듯, 농지를 경작하고 피땀 흘려 일군 농부들도 농지 소유주의 '졸(卒)'로 전락했다.
임대료 치솟지만 지원 못 받는 임차농
지난달 24일 찾은 제주도 농지는 투기꾼들에겐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제주도 땅값 상승률은 2015년 7.75%, 2016년 8.33%, 2018년 4.99%로 전국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했지만 중국자본 유입과 관광산업 개발 등 호재가 잇따르면서 땅값을 확 끌어올렸다. 특히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는 2015년 11월 제2공항 부지로 결정되면서 최근 주춤했던 제주도 다른 지역과 달리 농지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다.
투기꾼들이 성산읍 농지 취득에 열을 올릴수록, 농부들의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 땅 주인들은 차익 실현에만 관심이 있어, 농지 이용 방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채호진(51) 성산읍농민회 사무국장은 “투기꾼들은 땅값이 계속 오를 거란 생각에 있는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농지를 매입한다”며 “임차농에게 임대료를 계속 올려 받는 것도 투자한 돈을 조금이라도 메우겠다는 심산”이라고 전했다.
농지 투기가 임대료 상승만 유발하는 건 아니다. 땅 주인이 농지를 경작한다고 속이면 정부 보조금을 제공받고 양도소득세 감면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실제 농사일을 하는 농부는 ‘가짜농부’가 되는 반면, 투기꾼들은 ‘진짜농부’가 되는 세상이 펼쳐진다. 서귀포시 1만㎡ 농지에서 월동 채소를 재배하는 임차농 오창건(가명ㆍ43)씨는 "최근 시가 지원하는 방풍망 피복재배 지원사업은 투기꾼 배를 부르게 해주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사업은 자연재해로부터 농작물 피해를 최소화하고 농가 생산비를 절감시키려는 목적에서 시작됐지만, 지원 대상은 농업경영체 등록자로 제한된다. 오씨가 일하는 채소밭의 경우 실제 농사를 짓는 오씨가 아닌 땅 주인이 등록자로 돼있어, 혜택은 고스란히 부재지주에게 돌아간다. 오씨는 “땅 주인이 '2년 더 자경하는 것처럼 보여야 양도소득세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정식 임대차계약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호(54) 제주도의원도 성산읍 농지를 매입했다. 고 의원 배우자는 2014년 말 성산읍 일대 밭과 임야 4,875㎡를 지인 A씨와 함께 ‘지분 쪼개기’ 방식으로 12억5,000만 원에 사들였다. 고 의원 배우자는 농지를 매입한 날 해당 농지를 담보로 5억 원 정도를 대출받았다. 1년 뒤 해당 농지는 성산읍이 제2공항으로 선정되면서 땅값이 치솟아 현재는 땅값이 100억 원을 훌쩍 넘었다. 7년 만에 8배 이상 땅값이 오른 셈이다.
지난달 말 고 의원이 사들인 해당 농지를 찾아보니, 공동 소유주인 A씨가 컨테이너 박스에 앉아 유채꽃밭을 운영하며 관광객들에게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입구에는 노란 꽃들이 뒤덮여 있었지만, 유채꽃밭 너머에는 월동무가 수확이 안 된 채로 방치돼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수확을 안 한 이유에 대해, A씨는 "월동무가 과잉 생산돼 제값보다 낮은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 자체 처분키로 했다"면서 "최근까지 임대로 운영했지만 시국이 어수선해 직접 농사 짓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 의원은 이에 대해 "해당 농지는 주변 사람이 추천해서 매입했다. 처음엔 임대차계약을 했지만 3년 전부터는 배우자가 직접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해명했다.
농부에 이어 농지도 핍박받아
농지가 투기 대상으로 전락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해당 농지로 돌아온다. 진짜 농부들이 공익직불금과 지자체 보조금을 못 받다 보니,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농지는 서서히 황폐화된다. 김기영(51) 전북도의원이 2014년 매입한 제주시 한경면 일대 밭에는 수확되지 못한 월동무가 방치된 채 기장이 심겨져 있었다. 김 의원은 매입 당시 농업경영계획서에 '자기 노동력'으로 직접 마늘과 감자를 심겠다고 기재했지만 현재까지 농어촌공사에 임대한 상태다. 김 의원 소유 농지 인근에서 기장을 심고 있던 마을주민 김모(39)씨는 "저렇게 무를 처리하지 않고 방치하면 가스가 배출돼 농지를 훼손시켜 지력(地力)을 약하게 만든다"며 혀를 찼다.
임대료 상승을 못 버티고 임차농이 자주 바뀌면 농지는 더욱 망가진다. 제주 한경면 인근 농지에는 지력을 높이려고 보리가 심겨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땅에 해로운 화학비료가 뿌려진 농지도 적지 않았다. 자신의 농지에 보리를 심은 마을주민 최모(63)씨는 "내 땅이면 장기적으로 지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보리를 심지만, 임대료 부담이 큰 임차농들은 최대한 수입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화학비료를 쏟아붓는다"고 말했다. 고창건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 사무처장은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면 유기비료 제공 혜택이 있지만, (땅 주인 반대로) 임차농 등록을 못 하는 농부가 부지기수라 농부와 농지 모두 파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농지가 투기 대상이면 가짜농부 생겨
제주뿐 아니라 세종과 경기 안성 등 투기과열지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투기꾼들 바람대로 농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평생 한곳에서 농사 짓던 농부들이 하나둘씩 쫓겨나고 있다. 세종시 연서면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던 정모(54)씨는 최근 대구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땅 주인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씨는 "임대차계약을 요구하면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새 주인이 통보해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정씨가 정식 계약 없이 농사를 지어야, 땅 주인 입장에선 자경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가 경기 안성지역 농지 소유 및 이용 실태 조사를 맡았던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농어촌특위) 담당자와 동행해 농민들을 만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안성에서 감자 농사를 짓는 마을이장 이관호씨는 "인근에 산업단지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외지인들이 농지를 사들여 지금은 원주민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농어촌특위의 ‘농지 소유 및 이용 제도 개선 방향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안성에 농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타지에 살고 있는 부재지주 비율은 32.8%에 달한다. 농어촌특위 관계자는 "농지로는 개발이익을 낳을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야, 농부들이 쫓겨나지 않게 되고, 농업경쟁력 향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농지 소유 공직자 개인별 상세내용은 <농지에 빠진 공복들 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farmmap/> 참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