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력 성범죄 전조' 속옷 상습절도
편집자주
‘묻지마 범죄’라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상 범죄’가 늘고 있다. 범행 동기는 물론 방식과 대상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괴기한 범죄들이다. 이상 범죄 증가는 결국 우리 사회가 이상 사회로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경고다. 한국일보는 ‘신(新) 이상 범죄의 습격’ 연재를 통해 사회적·심리학적 부검을 시도한다. 범죄를 막을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2019년 9월 4일 자정, A(26)씨는 경기 의정부시 주택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30여 분 동안 동네를 한 바퀴 돈 A씨는 야식 배달기사가 공동현관문을 통해 오피스텔에 진입하는 걸 보고 잽싸게 따라 들어갔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배달원을 피해 그는 계단을 올랐다.
5층 옥상에 도착한 A씨의 눈에 빨래 건조대가 들어왔다. 이 층에 사는 여성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잠시 내놓은 것이었다. 건조대에는 팬티 2장과 브래지어 2장이 걸려 있었다. A씨는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속옷들을 가져온 백팩에 쑤셔넣고 부리나케 건물을 빠져나왔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주변 폐쇄회로(CC)TV를 통해 A씨 소행을 파악하고 그를 검거했다. 경찰이 A씨의 집을 뒤졌더니 상의 6벌과 원피스 3벌, 브래지어 14점과 팬티 39점, 브래지어 패드 10점 등 총 72개 130만 원 상당의 여성 의류가 발견됐다.
A씨의 절도 행각은 그해 3월 시작됐다. A씨는 출입이 어려운 아파트 대신 빌라나 오피스텔이 몰려있는 주택가를 노렸다. 공터나 옥상에 놓인 건조대가 주요 타깃이었다. A씨는 2017년에도 마트에서 여성 속옷을 훔쳐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적 있었는데, A씨는 이 전과에 대해 "무직 상태로 지내다가 호기심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의정부지법은 지난해 7월 야간주거침입절도 및 절도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0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성도착증으로 입원 치료 중이고 앞으로도 꾸준히 치료받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며 "피고인의 어머니와 누나가 피고인을 선도하겠다며 선처를 탄원한 점도 고려했다"고 실형을 유예한 이유를 밝혔다.
"훔치고 싶은 충동, 참을 수 없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절도 범죄 발생 건수는 2011년 28만1,362건에서 2019년 18만6,957건으로 30% 이상 감소했다. CCTV 증가와 과학수사 기법 발달에 쫓겨 금품을 노린 범죄는 대거 사이버상으로 옮겨간 지 오래다.
하지만 여성 속옷을 노린 절도는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은밀한 범죄'의 상당수는 상습범 소행이다. 현행법상으로는 단순 절도여서 여간해선 엄벌을 받지 않지만, 성범죄를 비롯한 강력 범죄로 발전할 가능성이 적지 않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수사당국 안팎의 공통된 지적이다.
속옷 절도범 대다수는 범행 동기로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든다. 2016년 여성 속옷을 훔쳐 기소됐다가 집행유예를 받은 40대 남성은 풀려난 당일부터 다시 주택가를 돌며 여성용 스타킹과 속옷 191점을 훔치다가 다시 붙잡혔다. 평소 충동조절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그는 경찰 조사에서 "속옷만 보면 어쩔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또 다른 남성은 지난해 6월 6~18일 서울 중랑구 일대 가정집에 10차례 침입해 여성 속옷 등을 훔쳤다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는데, 같은 범행으로 5번째 처벌된 것이다. 50대인 그는 범행을 들키지 않으려 방범용 CCTV를 마스크로 가리는 등 치밀하게 행동했지만 수감을 피할 수 없었다.
고시원, 빌라, 주택 등 외부인 출입 통제가 적은 주거지가 속옷 도둑들의 주요 타깃이다. 아예 옥상만 노리는 '전문털이범'도 있다. 2018년에는 6차례에 걸쳐 옥상 빨래건조대에 널린 여성 속옷 41점을 훔친 남성이 징역 8개월에 처해졌다. 올 초에는 가스 배관을 타고 빌라 베란다로 침입한 속옷 절도범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속옷 절도는 스토킹 범죄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2019년 경남 창원시에선 한 남성이 특정 여성을 상대로 집착적인 절도 행각을 벌였다. 그는 피해자가 집에 자주 찾아오는 친척을 위해 우편함에 열쇠를 보관하는 것을 알고, 피해자가 없는 시간대에 세 차례 집에 침입해 팬티 6장을 훔쳤다.
'성도착증'이 부른 범죄
의학계에서는 특정 물건에 집착하는 증세를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본다. 아이가 인형과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거나, 물건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면서 악취·건강 문제를 유발하는 경우(저장강박장애)가 대표적 사례다. 특정한 물건만 노리는 상습절도 역시 강박장애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습절도범의 집착 대상은 자전거, 스피커 등으로 다양하다. 2015년 인천에서는 상습적으로 음향기기만 골라 훔치던 김모(46)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과거 서울 종로구에서 재즈음악카페를 운영하며 음악애호가로 살아오던 그는 사업 실패로 고가의 스피커나 앰프 등을 구입하기 어려워지자 범행에 나섰다. 수도권 상가를 돌며 17차례에 걸쳐 678만 원 상당의 음향기기 20점을 도둑질했고, 훔친 기기를 개조해 자기 집에 음악감상실을 만들기도 했다. 강원 강릉시에선 주차된 차량을 노려 총 37개의 타이어를 송곳 등으로 찌른 40대 남성이 검거됐는데, 그는 경찰 조사에서 "타이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옷 상습절도는 성(性)과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보통의 강박장애성 범행과 구별된다. 속옷에 대한 집착은 성도착증(페티시즘)의 일종인 '물품음란증'과 관련 있다는 분석도 많다. 물품음란증은 성적 대상을 상정하며 무생물인 물건에 흥분을 느끼고 집착하는 경우를 뜻한다. 성적 욕구를 비정상적으로 충족하는 행위인 셈이다.
6년 전 부산에서 발생한 속옷 절취 사건의 범인도 물품음란증세를 호소했다. 이 남성은 17세 때 동네 형이 여자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모습에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2000년대 초 결혼해 아이도 낳은 그는 청소년 시절 저지른 강도 및 폭력 전과로 취업이 힘들어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의 탈출구를 어릴 적 흥분의 기억에서 찾았고 33세 때인 2006년 속옷 절도에 발을 들였다.
2017년 대구에서는 6년에 걸쳐 속옷 859개를 훔친 50대 남성이 덜미를 잡혔는데, 그는 우울증 증세를 호소하며 "예쁜 속옷만 보면 기분이 좋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2008년 이혼 후 혼자 살면서 속옷에 집착하는 성벽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물품음란증을 포함한 성도착증의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의학계에선 자폐스펙트럼장애(SAD) 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성도착증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한편에선 유아기나 청소년기에 부모와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거나, 성장기에 왜곡된 성적 인식을 가졌거나, 가정 불화 등 일상적 스트레스를 겪을 때 성도착증이 발현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속옷 도둑질이 강력 성범죄 단초될 수도
비뚤어진 욕망에 기반한 상습절도는 성범죄를 비롯한 강력범죄로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 6월 제주에서도 여성 속옷을 훔친 전과가 있는 남성이 술에 취해 길거리에 앉아있던 여성을 인적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추행한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받았다.
경찰청이 발간한 범죄행동분석연구 창간호에 실린 '물품음란증에 대한 이론적·경험적 고찰'에 따르면 성적 살인으로 검거된 피의자의 40%가량은 주거침입절도 전과가 있고 이런 전과 대부분은 페티시즘이나 관음증에서 시작됐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임흠규(경찰청 과학수사계 경사) 프로파일러는 "페티시즘으로 각성된 상태에서는 마음에 드는 속옷을 손에 넣거나 외부적 요인으로 절도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 최초 범행 지역을 배회하며 연쇄적 절도 행각을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현행법은 속옷 도둑을 절도범으로만 취급해 범행 예방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성범죄와 유사한 특성이 있는데도 법적으로는 주거 침입이나 단순 절도로만 처벌할 수 있어 비교적 가벼운 처벌에 그칠 때가 많다.
지난 3월 경남 진주시에서 20대 여성의 집 앞마당 빨래건조대에서 속옷 4벌을 훔친 남성에게 법원은 선고유예를 내렸다. 지난해 1월 전북 남원에서는 택배기사가 40대 여성이 사는 집에 배달차 방문했다가 안방에 침입해 속옷 2개를 훔치고 그중 하나는 직접 입고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한 처벌은 집행유예였다.
속옷 절도범에게는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도 내릴 수 없다. 해외에선 치료가 필요한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선 아직까지 단순한 '도벽'으로 치부되는 탓이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여성의 속옷을 훔쳐 심리적 쾌락을 얻는 사람은 관음증이나 성도착증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런 정신질환이 있다면 자기 의지로 범행을 중단하기 어려워 상습범이 되기 쉽다"고 말했다.
사이버공간으로 번지는 속옷 페티시즘
속옷에 대한 집착은 온라인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헌옷 수거함을 뒤져 찾은 여성 속옷을 보여주는 유튜브 채널이 논란이 됐다. 해당 유튜버는 그렇게 찾은 옷가지를 직접 손빨래하는 영상을 올리거나 속옷 일부를 구독자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구독자 수 5,000명, 영상별 최대 조회 수 38만 회를 기록했던 이 채널은 현재 관련 영상 200여 개를 모두 삭제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수거함에 담긴 옷은 수거함 설치자 소유라 절도죄에 해당될 수 있고 실제로 실형이 선고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도 "단순 절도에 해당돼 처벌 수위는 높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 등에선 일부 여성들이 자신이 입었던 속옷이나 스타킹을 판매한 일도 있었다. 페티시즘을 부추기며 돈벌이로 악용한 셈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성도착증이 심해지면 성범죄로 발전할 수 있는 만큼 이런 행위에 대해선 '사이버 공간에서의 공연음란죄'를 적용하는 방안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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