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한 집에 사는 가족의 수는 종종 달라진다. 둘이서 출발해 아이가 태어나면 늘어났다가, 아이가 성장하면 다시 줄어든다. 2년 전만 해도 4인 가구였던 한혜영(41)ㆍ박성진(44)씨 부부는 같이 사는 식구가 6명까지 늘어났었다. 그러다 최근 양육을 맡았던 할머니가 분가해 현재는 부부와 세 아이를 포함한 5명이다.
탄력적인 가족의 삶에 맞춰 부부는 1년여 전 경기 양주시 산골짜기에 집(대지면적 404㎡ㆍ연면적 193.33㎡)을 지었다. 부부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4인 가구에 맞춘 일반화된 아파트 구조가 우리 가족과는 잘 맞지 않았다”라며 “아파트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부는 같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가족의 집은 건축사(HH아키텍스 대표)인 아내가 설계했다. 건축잡지 편집장을 지낸 남편은 공간기획자로 일한다.
밖은 석재 슬레이트, 안은 노출 콘크리트
가족의 집은 오래된 산골 동네 끝자락에 있다. 산 아래의 집 바로 옆엔 청주 한씨의 사당이 있다. “신도시의 반듯한 택지가 아니라 자연적인 요소로 둘러싸인 땅이었어요. 포근하게 우리 가족을 품어줄 것 같았어요. 제가 마침 청주 한씨기도 했고요. 그래서 풍경을 해치거나 튀지 않게 집은 가장 단순하게 짓고 싶었어요. 마치 산에서 돌멩이가 굴러와 콕 박힌 것처럼요.” 네모 집에 세모 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형태의 집 외장재는 천연 석재 슬레이트다. 전통 가옥인 너와집(얇은 조각의 나무나 돌을 지붕에 올린 집)처럼 두께 0.5㎝의 얇은 돌을 켜켜이 지붕부터 벽체까지 이어 붙였다. 슬레이트 아래로 홈통과 배관 등을 숨겨 군더더기를 없앴다.
내부도 장식을 최소화했다. 벽지나 페인트 등을 바르지 않은 날것의 콘크리트를 바닥과 벽, 천장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집 안팎의 재료가 모두 자연 소재인 돌이 기반이다. “원래 갖고 있던 원형 그대로의 재료를 자연스럽게 쓰고 싶었어요. 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한 번 쓰고 버리는 거푸집 합판도 쓰지 않았어요. 벽 곳곳에는 작업자들이 기록한 수치가 적혀 있고, 크고 작은 기포 구멍도 있어요. 이런 의외의 것이 주는 재미와 매력이 좋아요. 콘크리트가 몸에 나쁘다는 편견도 있지만, 유해 물질은 콘크리트 외부에 바른 접착제나 마감재에서 나오는 거여서 건강 문제는 오히려 없었어요.”
거칠고 차가운 회색의 콘크리트 벽을 따뜻하게 물들이는 것은 곳곳에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다. “나무 소재의 가구를 두고, 따뜻한 색감의 그림을 걸고, 패브릭을 활용하고, 채광을 확보해 회색의 콘크리트가 따뜻해 보이도록 보완했어요. 저희 집은 여름에는 항상 밖이 초록빛이고, 겨울에는 눈이 내려 온통 하얘요. 외부에 자연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내부에 과감하게 콘크리트를 쓸 수 있었어요. 회색의 도시 풍경에서는 어울리지 않았을 겁니다.”
동일한 크기의 평등한 공간
집의 재료뿐 아니라 내부 구성도 통념을 깬다. 통상 아파트에서 거실과 안방은 가장 좋은 위치에 배치되고, 크기도 가장 크다. 제한된 공간에서 방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차별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근에는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주방의 권력이 강력해졌다. 하지만 부부의 집은 거실과 주방, 부부의 침실과 아이 방 등 집의 모든 공간이 가로세로 3.6m 크기로 동일하다. 평균 천장 높이(2.4m)도 같다. “가족이 많다는 건 그만큼 서로의 취향과 의견이 다양하다는 얘기예요. 집을 지으면서 다양한 가족 구성원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들에게 평등하게 공간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라고 작은 방을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건축으로 가족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었죠.”
같은 크기의 공간이지만 저마다 특징이 분명하다. 방마다 창의 형태가 다르고, 보이는 풍경도 다양하다. 1층 거실에서 사당의 외벽과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면 2층 서재에선 사당의 안쪽 뜰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평평한 천장인 1층과 달리 경사 지붕 형태를 따른 2층은 같은 크기여도 더 넓어 보인다. 균등한 공간의 밀도도 다르다. “거실과 주방은 본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거실에서는 다 같이 모여 TV를 보거나 같이 놀고, 주방에서는 요리하고 함께 식사하는 공간으로 한정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인다고 공간이 꼭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같이 있을 때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요.”
아이들의 요구사항도 담았다. 예전 아파트에서 같은 방을 썼던 초등학생인 두 아이가 집을 지으면서 각자의 방을 요구했다. 단 서로의 방을 연결하는 비밀의 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층에 배치된 첫째와 둘째의 방 중간에는 연결 통로를 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열린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이 통로와 연결된다.
공간들은 유연하다. 가족의 변화에 맞춰 변주가 가능하다. 지금은 테라스가 있는 부부의 침실이지만 별빛 아래 맥주를 홀짝이는 성인이 된 자녀의 방이 될지 모른다. 첫째 아이의 방은 이제 걸음마를 뗀 막내의 차지가 될 수 있다.
각자의 넉넉한 공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집의 매력으로 꼽는 공간은 따로 있다. 집 중앙에 배치된 사이 공간인 계단이다. 계단 위 높이 7m의 여백과 함께 창을 시원하게 냈다. 남편인 박씨는 최근 펴낸 ‘모든 장소의 기억’(문학동네 발행)에서 집의 계단에 대해 “디귿자로 돌아 오르는 중간 계단참에 서서 보면 바로 야트막한 뒷산 텃밭부터 저 멀리 굽이치는 산능선까지 훤히 들어오는 계단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밝혔다. 와인 한잔 걸터앉아 마실 수 있는 계단을 꿈꿨던 아내의 로망도 실현됐다. 부부는 “잠에서 깬 아이들이 아침에 계단을 내려오다 창 밖으로 어떤 새가 왔는지, 어떤 꽃이 폈는지 유심히 살피는 모습을 볼 때 집 짓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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