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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의료비(본인부담금과 비급여의료비)를 지급하는 실손의료보험은 가입자가 4,000만 명이나 된다. 연간 보험금 청구 건수도 1억 건 안팎이다. 이처럼 국민 생활과 밀접한 상품이지만 보험금 청구 절차는 미개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병원에서 영수증과 진료비 세부내역서 등을 문서로 발급받은 뒤 이를 다시 보험사로 보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일일이 팩스로 전송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보낸다. 이 과정이 복잡하고 번거로워 아예 단념하는 경우도 많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손보험 청구를 포기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절반에 달했다. 다시 병원에 갈 시간이 없거나 서류를 보내는 게 귀찮기 때문이다.
□ 해결책은 간단하다. 소비자가 신청할 경우 병원에서 곧장 보험사로 증빙자료를 보내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도입하면 된다. 이러한 논의가 시작된 게 벌써 12년 전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09년 요양급여 운영체계 제도개선안을 통해 실손보험금의 서면 청구에 따른 행정적·경제적 낭비가 심하다며 관리시스템 개선을 권고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도 해마다 기자회견과 성명 발표를 통해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촉구하고 있다.
□ 그럼에도 그동안 개선되지 않은 건 의료계의 반대와 당정의 직무 유기 탓이 크다. 의료계는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한다. 기본적으로 의료기관이 개별 보험금 청구 서류 전송의 주체가 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와 정부는 이러한 의료계 반발에 눈치만 보면서 허송세월했다.
□ 올해도 실손보험금 청구 과정에서 필요한 종이는 4억 장에 달할 전망이다. 발급받아 사진만 찍으면 사실상 버려지는 서류다. 국민적 불편, 국가적 낭비도 문제지만 지구 환경도 파괴한다. 통상 30년생 나무 한 그루로 A4 용지 1만 장을 만든다고 한다. 4억 장의 종이를 아낄 수 있다면 4만 그루의 나무를 살릴 수 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 정보기술(IT) 강국에서 언제까지 서류를 떼야 하나.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말대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개정안도 발의됐다. 이젠 눈치 보지 않는 국회, 제 할 일 하는 정부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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