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로 살다보니 피아노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만나곤 한다. 그중 상당수의 책들은 피아노곡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해설서이거나 피아노 연주의 어려운 테크닉을 극복하기 위한 지침서들이거나 혹은 음악가들의 생애를 다루는 전기들에 편중되어 있는 형편이다. 음악에 관한 책을 함께 읽는 독서모임을 이끌면서 구성원들에게 여러 책들을 소개해왔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저자는 프랑스의 콘서트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Alexandre Tharaud)였다.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프랑스에서 출판된 책의 원제는 ‘Montrez-Moi Vos Mains’이다. 한글로 번역하면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인데, 한국에서 출판되면서 문장 앞에 ‘이제’를 덧붙였다. 편집자의 의도라 할 ‘이제’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공연장과 호텔을 전전하며 전 세계를 떠돈다. 어떤 밤은 여행가방조차 활짝 열지 않는다. 비행기 이동으로 내내 날아다니는 삶을 반복하는 솔리스트의 삶은 그 어감처럼 고독한 여행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 매일 다른 하늘, 다른 길 위를 떠돌며 객석의 수많은 청중을 만나지만, 사람들보단 피아노와 더 많은 감정을 공유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거장들의 삶에 몰입한다. 외로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휴대가 가능한 다른 악기와는 달리 피아노란 악기는 동반자로 함께 이동할 수 없다. 낯선 타인과 만나듯 늘 새로운 악기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독주 리사이틀은 연극으로 비유하자면 1인극 모노 드라마와 같다. 저자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무대에 오르는 과정을 생생하고도 처절히 묘사한다. 연주자는 왜 무대공포증에 시달리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2가지로 꼽는다. 첫째, 늘 바뀌는 청중 탓이다. 둘째, 똑같은 무대는 없다. 녹음된 음악이라면 같은 연주를 다시 재생할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선 동일한 곡을 같은 사람이 연주하더라도 매번 달라진다. 일회성과 현장성이라는 위험변수는 저자를 늘 괴롭힌다. 책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연주자 특유의 직업병도 흥미롭다. 어린 시절부터 시달렸던 악몽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히 등장하고 멜라토닌을 비롯해 여러 수면 보조제에 의존하는 것도 숨기지 않는다. 매번 바뀌는 청중들, 낯선 사람들의 몰이해에 저자는 이렇게 강변한다. ‘이해시키려 들지 말 것. 연주자는 매개자일 뿐 선생이 아니다.’
저자는 직업 연주자이지만 전문적인 음악용어를 남발하며 일반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외려 에세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 순회공연을 떠나 여러 도시에서 만났던 맛집을 줄줄이 꿰어낸다든지, 나라마다 다른 페이지터너(악보를 넘기는 사람)의 성향을 분석한다든지, 민감하면서도 까불거리는 저자의 성향이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작곡가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곁들인 인상비평도 흥미롭다. 바흐는 부단한 집중을 요구하고, 모차르트는 연주자를 벌거숭이로 만드는가 하면, 베토벤은 오케스트라 기술자이며, 쇼팽은 가수처럼 노래해야 하는데, 라벨은 꼼꼼한 외과의사와 같다는 저자의 재기발랄한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해당 작곡가의 음악을 찾아듣도록 유인하기도 한다.
이 책을 함께 읽었던 독서모임의 구성원들은 무엇보다 무대 위 화려한 조명의 후광으로나 접하던 머나먼 음악가를 한 사람의 소탈한 인간으로 그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점을 매력으로 꼽았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 문장들을 툭툭 짧게 던지는데, 디테일한 묘사에선 저자의 유별난 감수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섬세한 위트가 스며 있다. 전문 음악용어가 남발하는 현학적인 책이 아니라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일기체 독백이어서 일반인들도 쉽게 몰입할 만한 에세이라는 것이다. 섬세한 감성을 가진 피아니스트의 문체는 연주자의 민감한 손끝과 닮았다. 저자의 연주를 찾아 들으며 독서할 수 있는 것도 쏠쏠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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