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곽문환 응급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루걸러 하룻밤을 새우던 전공의 시절 어느 날이었다. 밀려드는 응급환자에 숨 쉴 틈조차 없다가 잠시 한숨을 돌리니 새벽 1시였다. 앉은 자리에서 잠깐 눈이라도 감고 있어야겠다 싶었는데, 새 환자가 막 도착했다. 혈압 50에 30, 맥박은 분당 150회. 희미하게 남은 의식은 통증에만 겨우 반응하고 있었다. 이 정도 활력징후면 병상 배정을 기다릴 새도 없다. 신체 진찰과 치료를 동시에 시작했다. 패혈증쇼크로 판단돼 우선 항생제를 주고, 수액을 대량으로 투여하며 중심정맥관 삽입을 준비했다.
의료진 여럿이 붙어 다급하게 움직이는 그때였다. 환자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온 환자의 아들이 노발대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돌아가실 분한테 뭐하는 짓이냐’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침대 옆에 붙어 두 팔을 가로저으며 의료진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모든 환자는 살기 위해 응급실에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밤을 새며 응급실을 지킨다. 죽어가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혈기왕성한 응급실 전공의였다. 환자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는 보호자 태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고, 환자 아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난 급한 마음에 대기실로 뛰어가 다른 가족들을 찾아냈다. 환자의 딸에게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이랬다. 그 환자는 부산의 한 요양원에서 오랫동안 누워 지냈다. 그런데 최근 폐렴이 겹쳐 무척이나 고생을 하고 있었다. 요양원 측은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됐다고 보호자에게 설명했고, 모든 가족들이 모여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 같이 서울로 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저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내가 속해있던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환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난처해진 장례식장 직원은 이들에게 응급실로 가라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죽음으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른 응급실인데, 응급상황이어서 온 게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들른 응급실인데, 내가 ‘살려 내겠다’며 보호자들과 싸웠던 거였다. 수액 치료도 거부한 가족들은 결국 심폐소생술 거부동의서까지 서명을 하고 응급실 한쪽을 차지하며 임종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 또 한 명의 환자가 들어왔다. 통상 절차에 따라 모니터를 통해 주 호소 증상부터 확인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움직였어요.”
급히 소생실로 가니, 정말 검은 옷 차림의 장례식장 직원과 망자의 자녀가 와 있었다. 망자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겉으로만 살펴도 이미 돌아가신 지 한참 된 분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선 아들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움직이시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면서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 아니냐"고 했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감시하듯 보고 있는 그 아들 앞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심전도 모니터를 붙여봤지만 평행선만 이어졌다.
이번에도 보호자들 중 딸이 나서 사정을 얘기해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이 속상한 마음에 과음을 했는데, 입관 도중 아버지가 움직인 것을 봤다며,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응급실로 시신을 다시 모시고 온 것이다. 장례식장 직원도, 다른 가족들도 아들의 고집에 난처해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아들에게 아무 반응이 없는 모니터를 보여주며 이미 돌아가셨다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벌건 얼굴로 "그렇다면 왜 우리 아버지가 움직인거냐"며 따져 묻는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날 응급실에서 벌어진 두 장면을 아직도 난 잊을 수가 없다. 응급실 소생실에는 "살아있다"며 장례식장에서 온 망자가 머물고 있었고, 바로 옆 중환자실에는 장례식장으로 가기만을 기다리는 환자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이미 사망한 현실과 아직 살아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 의사의 역할은 사람을 잘 살려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죽음 문턱에 선 사람들을 살려내는 기술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혔다. 사람을 살린다는 것만이 고된 밤샘 근무를 버텨내게 해주는 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들을 겪으면서, 잘 살려내는 것만큼이나 잘 보내드리는 것 또한 의사의 역할 임을 점차 받아들이게 됐다. 소생술을 거부하는 가족, 사망 사실을 부정하는 가족들에게 더는 화를 내지 않게 됐다. 저마다 살아온 사정이 있을 텐데 의사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할 수는 없었다. 같은 진단명이라해도 환자와 보호자들이 살아온 인생, 그들의 뜻에 따라 치료는 달라져야 했다. 몇 번이고 환자 본인의 뜻을 묻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반복해 확인했다.
잘 살려내는 것, 그리고 잘 보내드리는 것. 모두 중요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그렇게, 난 응급의학과 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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