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복지체제, 진입 어렵고 필요 충족도 어려워
전문가들 "전 세계 맞춤형 복지 흐름에 발맞춰야"
편집자주
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의젓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책적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의 불안한 삶을 지탱하는 건 가족의 안간힘이다. 국내 장애인 규모가 등록된 인원만 해도 262만 명이니, 이들을 돌보는 가족은 못해도 1,000만 명을 헤아릴 터이다. 장애인 가족의 짐을 속히 덜어주는 것만큼 시급한 국가적 과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됐지만,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의 삶은 여전히 불편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장애 정도·소득 수준 등 행정이라는 틀에 맞게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제공되는 정형화된 서비스는 처지가 천차만별인 이들에겐 맞지 않는 옷이다. 돌봄·의료·안전 등에 대한 책임이 가족에게 오롯이 전가되고, 한순간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이 반복된다.
전문가들은 치매 국가책임제와 같은 '장애 국가책임제' 시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지난 10여 년간 보편적 복지를 위한 기틀이 닦인 만큼, 선별적 복지 강화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소외 문제 해소에 나설 때가 됐다고도 제언한다.
복지 개선돼도 혜택받기 힘들어
정부는 장애인 사회의 숙원이던 장애인등급제 폐지를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 중이다. 의학적 심사를 토대로 장애 수준을 1~6급으로 나누고 차등 지원하는 종전 등급제는 장애인의 서로 다른 욕구와 환경을 감안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수요자 중심'을 표방하는 새로운 장애인 지원체제는 장애 정도를 중증과 경증으로만 구분한다. 또 장애인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를 도입, 신청인의 생활 수행 능력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다 개별화한 지원 제공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장애 복지망에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다. 현행 장애인복지법은 15가지 장애 유형에 해당할 때만 장애인으로 인정해 준다.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장애는 아무리 정도가 심해도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이렇다 보니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는 인정되지만 두 장애가 복합된 시청각장애는 목록에 없어 둘 중 하나만 지원받을 수 있는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스치기만 해도 극심한 통증을 느껴 일상생활이 쉽지 않은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환자의 경우 끈질긴 투쟁 끝에 지난달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 그간 '통증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규정에 가로막힌 탓인데, 이런 상황은 대법원이 2019년 15개 장애 유형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유사한 유형이라면 유추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한 후에도 계속됐다. 결국 의료계가 '통증 증명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들어준 덕에 난관을 넘을 수 있었다.
장애 인정의 문턱을 넘어도 문제는 산적해 있다. 특히 지적장애나 자폐성 장애가 있는 발달장애인의 경우 장애 정도와 무관하게 자립이 쉽지 않아 이들의 생활을 보조해줄 국가의 돌봄서비스가 절실하다. 이 때문에 미국·일본 등은 일찌감치 발달장애인을 위한 법률을 따로 제정할 정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발달장애인법이 박근혜 정부의 제1호 법안으로 2014년 제정됐지만 실질적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에서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취임 후 발달장애인 지원사업 예산은 되레 줄었다.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2018년 4월 청와대 앞에서 삭발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뒤에야 정부는 그해 9월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듬해 시작된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주간활동 서비스는 국가책임제라는 이름이 무색한 수준이었다. 기존 지원 대상자였던 2,500명만 하루 최대 5시간 30분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판이 계속되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발달장애인 활동서비스 지침'을 개정해 활동지원 대상을 2020년 4,000명에서 9,000명으로 늘렸지만 사각지대는 여전하다. 특히 주간활동 서비스를 이용하면 활동지원(활동보조·방문목욕·방문간호) 서비스를 일부 포기해야 해 조삼모사식 정책이라는 원성을 샀다. 윤진철 부모연대 사무처장은 "새로운 서비스가 생겨도 기존 서비스에 제약이 생기면 이용이 늘어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이용이 적다는 이유로 예산이 삭감되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국가 책임 아래 이용자 중심 복지체제를"
전문가들은 정부가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구축 약속을 이행하고, 이를 발판으로 장애 전반으로 국가 책임을 확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발달장애는 특성상 영유아기부터 평생을 안고 가야 하고 이에 따라 가족의 돌봄 부담도 극대화된다. 여러모로 장애에 대한 국가의 책임성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수밖에 없다. 국내 발달장애인 수는 지난해 기준 24만7,910명으로 전체 등록장애인(263만3,000명)의 9.4%를 차지한다.
더불어 장애인 개개인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복지정책이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맞춤형 정책이 진전되면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의 부담이 줄고 당사자 역시 삶에 대한 선택권과 통제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김경미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인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끔 복지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며 "한국 역시 이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정책 입안자와 행정가가 사람 중심의 사고 방식을 토대로 서비스를 구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진철 사무처장 역시 "장애인 복지가 논의된 지 30~4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정부가 체계를 만들고 장애인은 그에 맞추거나 배제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며 "정부가 융통성을 발휘해 이용자에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어떻게 지원할 건지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나 살던 곳에서 돌봄 서비스를 받는다'는 청사진 아래 복지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사회 통합돌봄 서비스 역시 접근성과 편의성이라는 수요자 중심 가치가 우선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미옥(전북대 교수) 장애인복지학회장은 "장애인이 지역사회와 어울려 살아가려면 시설 접근이 쉽고 이용이 편해야 한다"며 "또 시설에서 자신의 상황과 환경을 전하면 맞춤한 서비스를 연결해주는 사례관리 시스템이 갖춰져야 진정한 '이용자 중심 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영유아기와 아동기를 포함해 장애인의 발달단계와 생애주기에 맞춘 정책 마련도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지난 12일 교육부가 △장애 발견 시 대응 지침 마련 △특수교원 및 기관 증가 등을 골자로 '장애아동 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을 두고 "사각지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 교수는 "영유아 장애의 조기 진단 및 개입, 도전 행동이 있는 장애 아동에 대한 지원, 성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필요한 지원 등 마련돼야 할 부분이 많다"면서 "특히 시설에 사는 장애 아동까지 놓치지 말고 필요한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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