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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민주주의 싹을 짓밟다

입력
2021.05.20 04:30
수정
2021.05.20 14:3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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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국회 프락치 사건

1952년 8월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2대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기록관 사진

1952년 8월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2대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기록관 사진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당과 대한청년단은 각각 14석과 9석을 얻었다. 야당인 신익희의 민주국민당과 윤치영의 대한국민당은 각 24석을, 무소속은 무려 126명으로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5월, 이승만이 부산 피란지에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직선제 개헌에 착수했다. 7월 경찰과 군인들이 에워싼 국회에서 강압적 기립 거수 표결방식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됐고, 이승만은 장기 집권의 포석을 깔았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테러였다.

한 해 전인 1949년 5월 20일, 제헌의원 이문원 등 현역의원 3명이 검찰에 구속됐다. 6월에는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한 의원 7명이, 8월엔 4명이 추가로 구속됐다. 남로당 사주를 받아 국회 내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들 대부분은 모두 집권 여당에 맞선 소장파였고, 주요 주장은 외국군대(미국, 소련) 철수 및 군사고문단 반대, 남북정치회담 개최를 골자로 한 평화통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 강화 등이었다. 이승만에게는 미국(미군)이 필요했고, 평화통일이 아니라 북진통일이어야 했고, 치안 유지를 위해서는 친일파 경찰이 있어야 했다.

기소 근거는 고문과 강압에 의한 자백, 체포한 남로당원에게서 압수했다는 신빙성이 입증되지 않은 암호 문서, 이문원과 노일환의 남로당 입당 및 접촉 정황이 전부였다. 암호문서를 소지했다는 공작원은 프락치사건 공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1949년 9월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피의자 측 변호인단의 거듭된 재판 출석 요구에도 불구하고 재판 도중 전격 처형됐다.

피의자들은 재판에서 혐의 일체를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1950년 3월 징역 10~3년형을 선고했고, 항소심 심사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들 대부분은 월북했고, 월북하지 않은 유일한 피의자 서용길(징역 3년) 역시 '재난 상황'으로 인해 항소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진상과 별개로, 그 역시 수사도 사법절차도 무시된 의회민주주의의 파괴 행위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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