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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 자율주행, 5세대 이동통신(5G) 등 4차 산업혁명에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반도체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전략자산으로 취급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13일 2030년까지 총 510조 원을 투자하는 ‘종합 반도체 강국 실현을 위한 K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불균형한 반도체 시장과 산업
글로벌 반도체 전쟁은 두 가지 불균형을 증폭시켰다. 첫 번째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품귀 현상이 수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차량용 반도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기업들이 일부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할 정도로 심각하다. 백악관은 지난 2월 24일 반도체를 포함한 희토류, 의약품, 고용량 배터리 등 4개 품목의 공급망을 100일 동안 우선 점검하는 ‘미국의 공급망’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4월 12일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가경제위원회가 개최한 반도체 공급망 점검 회의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기도 했다.
두 번째 불균형은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지난달 발간한 '불확실성 시대에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강화 방안'에 따르면, 2019년 반도체 부품을 사용하는 전자제품 생산업체의 본사를 기준으로 미국(33%)이 중국(26%)에 앞섰다. 그런데 이 제품이 제작·조립되는 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미국(19%)보다 중국(35%)의 비중이 더 컸다. 그렇지만 제품의 최종소비지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25%)과 중국(24%) 사이에 격차가 거의 없었다.
글로벌 공급망의 허브는 여전히 미국
이러한 불균형은 반도체 산업의 탈집중화와 분절화에서 기인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은 전체 수익의 약 50%를 차지하는 설계에 집중하고, 제조·조립·검사 등 나머지 공정은 해외기업에 외주를 맡기고 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하는 인텔, 마이크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같은 종합반도체회사(IDM)보다 공장 없이 칩 설계만 하는 브로드컴, 퀄컴, 엔비디아와 같은 설계기업(fabless)이 더 빠르게 발전했다. 설계기업은 반도체 제작을 TSMC와 같이 해외에 있는 위탁제조기업(foundry)에 맡기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생산량은 1990년 전 세계의 37%에서 2020년 12%로 감소했다. 반대로 중국과 동아시아가 반도체 제조 능력의 75%를 차지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내에서는 10나노 이하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데 있다. 수십 년 동안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왔던 인텔이 삼성전자와 TSMC를 추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0나노 이하 반도체는 대만(92%)과 한국(8%)에서만 제작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주재한 4월 백악관 회의에 해외기업으로는 이 두 기업만 초청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공급망의 허브는 여전히 미국이다. 미국은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설계, 설계 자동화(EDA) 및 지적재산권 코어(Core IP), 제작 장비 부문에서 전 세계 65%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대중 제재에 한국, 대만, 일본, 네덜란드 기업들은 물론 중국의 SMIC까지 준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별로 살펴보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설계, 웨이퍼 제조 및 조립·검사, 대만은 웨이퍼 제조 및 조립·검사에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웨이퍼 제조, 장비·소재·부품, 유럽(특히 네덜란드의 ASML)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특화되어 있다. 중국은 10나노 이상의 웨이퍼 가공과 조립·검사에서만 국제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생산시설 유치에 적극적인 미국
삼성전자가 미국에 170억 달러(19조1,600억 원) 투자를 결정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지정학적 리스크 회피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중 무역전쟁 발발 이후 첨단 반도체는 물론 반도체 제작에 필요한 장비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수출도 제한했다. 미국에서 반도체 칩을 직접 생산한다면 관세와 물류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수출통제와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공급망 재편이다. 2020년 우리나라의 반도체 교역 통계에 따르면, 중국(홍콩 포함)에 606.5억 달러, 미국은 80.7억 달러를 수출했다. 중국이 해외로 재수출한 분량을 제외한 최종소비지 기준으로 보면, 미국과 중국의 격차는 이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공급망과 최종소비지 사이의 지리적 격차가 크게 줄어들게 되면, 관세와 물류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시장 변화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다.
세 번째는 TSMC와 경쟁이다. 5월 4일 TSMC는 애리조나주에 1,000억 달러를 투자해 최대 5개 생산공장을 추가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상응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삼성전자가 미국 설계기업으로부터 위탁생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는 더 어렵게 된다. 그럴 경우 시스템 반도체에서 삼성전자와 TSMC의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다.
반도체 굴기를 추구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삼성전자의 대미 투자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제재가 장기화될 경우에 대비해 자국 내 생산을 늘려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한국 기업의 추가 투자가 절실하다. 중국에서 현재 삼성전자는 시안과 쑤저우에서, 다롄에 위치한 인텔 공장의 인수를 협상 중인 SK하이닉스는 우시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우리 기업이 중국에 추가 투자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 미국의 수출통제 목록에 있는 최첨단 장비를 중국으로 반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2017년 사드 배치 이후 등장했던 한한령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다. 2016~19년 중국이 자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함에 따라 LG화학(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시장 점유율이 하락했다. 2013년 일본을 제치고 중국의 최대수입국으로 등극했던 한국이 2020년에는 대만, 일본에 이은 3위로 두 계단 하락한 사실도 좋은 징조는 아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분쟁이 타결됐던 4월 11일 백악관이 직접 환영 성명을 발표했을 정도로 미국은 해외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아주 적극적이다. 삼성전자가 최첨단 생산시설을 건설할 경우 3월 30일 공표된 ‘미국일자리계획’에 포함된 반도체산업 지원책(500억 달러)의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각종 산업정책을 통해 자국 기업을 우선 지원하고 있다. 미국으로 향하는 해외기업을 중국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중국은 먼저 지정학적 리스크를 해소하고 해외기업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할 것이다.
이왕휘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에서 외교학과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정치학(박사)을 공부하고 동아시아를 둘러싼 미중 경제관계를 연구해 왔다. 공저로 ‘미중 전략적 경쟁,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풀어야 하나’, ‘위기 이후 한국의 선택: 세계금융위기, 질서 변환, 중견국 경제외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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