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제 아버지는 최근 위암 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희 가족은 난생처음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워요. 아버지를 향한 크고 묵직한 불신과 원망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가정에 성실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집에 안 들어오는 일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청소일과 식당일 등 궂은 일을 하면서 가정을 책임졌습니다. 저는 그 시절 내내 곁에 없는 아버지의 빈 자리와 희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살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클수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나는 왜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할까’란 고민이 늘 따라다녔어요. 저 스스로 가치가 없는 것 같았어요.
어느 날 부모님이 크게 싸웠어요. 아버지 외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자, 불쌍한 여자야”라면서 외도 상대를 어머니 앞에서 두둔하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 아버지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었습니다. 한번은 부부싸움을 하다 화가 난 아버지가 주방에서 칼을 찾기도 했어요. 놀란 어머니가 저를 다급히 불렀고, 아버지는 이내 미안하다고 했지만 너무나 공포스러웠어요.
두분은 결국 주말 부부가 됐고, 가족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모여 저녁을 같이 합니다. 아버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상황도 나아지자, 다정해지셨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행동들이 불편했어요. 어려서 돌봐주기 힘든 시기엔 모르는 척하고 다 크고 나니 잘 지내보자 손 내미는 것 같아서요.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이 거짓이라 의심됩니다. 아직까지도 제게 아버지는 정서적으로 부재해요.
어머니는 한평생 아버지에 대한 나쁜 얘기를 제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제가 어머니의 감정 쓰레기통처럼 느껴지고, 그런 과정에서 아버지를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물론 어머니의 인생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하고, 그 희생에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맙고 미안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부채감도 큽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면서 제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어요. ‘가족들의 염려에도 건강검진을 미루더니 결국 가족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걸까’, ‘그간 그렇게 어머니를 고생시키고 병수발까지 시키다니 정말 이기적이다’, ‘내가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아프게 된 걸까’, ‘후회하면 어쩌지’, ‘좋은 관계로 살아갈 시간이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떡하나’ 등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최근 두분은 크게 싸웠어요. 아버지는 항암치료도 중단하고 홀로 시골에서 자연치료를 하겠다며 가출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사과로 화해를 했고,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해결됐지만 저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요. 여전히 마음대로 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가 답답하고 불쌍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슬픔보다는 ‘이제 갈등이 끝나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드는 제가 끔찍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지선(가명ㆍ33ㆍ회사원)
지선씨, 저는 당신의 사연을 읽고 당신과 함께 천천히 걷는 마음으로 당신의 마음을 따라가보고 싶었어요. 우선 어린 시절 지선씨의 마음부터 헤아려 볼게요.
모든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린 당신은 외롭고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부재해서죠. 어린 시절 지선씨의 아버지는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당신과 아주 멀리 있었어요.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기보다 아버지는 가정을 신경 쓰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아내에게 미루었지요. 심지어 아버지의 마음은 가족에게 가까이 있기보다 다른 여자에게 향해 있었어요. 지선씨 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인, 자식 입장에서는 이기적인 아버지에 가까웠지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살펴봐야 하는 부분은 지선씨와 가족들이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지선씨에게 아버지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아버지 인생에서 내가 그리 중요한 대상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어요. 그런 아버지에게 지선씨는 “아버지, 저 사랑하세요”라고 묻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가 “아니”라고 대답할까 두려웠겠죠.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 당신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외도 상대에 대해 ‘불쌍한 여자야’라고 가족으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 지선씨와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밖에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끝내 좌절했을 거예요.
지선씨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생계를 꾸렸고, 외도한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살았어요. 당신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섭섭함을 넘어선 분노를 느꼈다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부담스러운 감정이 들었을 거예요.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한편 그런 어머니의 절대적 희생이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지선씨는 어린 시절에 받은 깊은 상처 때문에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다정하게 변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머리로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선씨의 가족은 가족의 기본적인 기능은 유지되지 않은 채 가족의 형태만 유지해왔어요. 마치 속이 빈 선물상자의 껍데기 포장처럼요. 이런 가족은 가족들의 상황이 좋을 땐 형태가 유지될 수 있지만, 위기에 처하면 형태로도 유지하기가 어려워요.
아버지가 갑자기 암에 걸리면서 그동안 유지돼왔던 가족의 형태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을 거예요. 같이 살면서 물리적 거리는 좁혀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갈등이 오히려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다시 한번 불거지고 재현됐을 거예요. 현재 아버지의 건강은 심각한 위기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게 되지요. 이런 아버지의 태도와 반응은 환자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가족을 등한시하고 아버지 자신을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아버지에게 서운함이 깊었던 지선씨는 상처 위에 생긴 굳은살 위에 또 상처가 나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을 거예요.
그러면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왜 이렇게 저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시는 거예요’라는 원망이 들고, ‘여전히 아버지는 가족보다 아버지가 먼저군요’라는 섭섭함을 넘어선 분노가 치밀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아픈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 같고, 도리에 어긋나는 게 당신을 괴롭고 고통스럽게 했을 겁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내면의 미성숙하고 나쁜 면들이 아버지로 인해 계속 건드려지고, 그 부정적 감정이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어요.
지선씨, 당신의 아버지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아버지한테 소중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당신 스스로 느꼈다면 그게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누구나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내가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자긍심을 느낄 때 자존감은 생기는 거니까요. 그런 확신은 대부분 나를 가장 사랑해줘야 할 대상인 부모가 나를 조건과 관계없이 소중하게 대해줄 때 느껴지죠. 그런 경험이 없었던 당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존감에 상처를 받았을까요. 어린 지선이가 가장 역할을 하는 어머니의 노고를 바라보면서, 외도한 아버지가 가족의 외로움과 삶의 힘겨움보다 외도녀의 마음을 더 공감하고 두둔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어머니와 지선씨를 공포에 떨게 한 그 순간, 어린 지선이의 마음 깊은 곳에선 아버지에 대한 미운 마음이 느껴지고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기준보다, 그냥 인간의 마음을 이해해보자면,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그럴 수 있거든요. 마음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지 보편적으로 인간은 자아의 기능을 작동시켜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지요.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 아버지가 위암 4기 진단을 받았을 때 당신 내면에 남아 있는 어린 지선이는 얼마나 괴롭고 죄책감을 느꼈을까요. 당신의 복잡한 심정과 아픔을 저는 깊이 이해합니다. 지선씨,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어린 지선이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지금 아버지를 미워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한 걸음 물러서서 잘 따라가 보면서 당신이 받은 영향을 알아차려보자는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당신을 소중하게 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 그 느낌이,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당신 아버지의 특성이었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아버지는 아마 다른 여성이랑 결혼해서 다른 아이를 낳았어도 똑같이 그렇게 했을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는 당신은 원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에요. 누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설사 그게 부모일지라도, 당신의 고귀한 가치가 절대 훼손되지 않아요. 교과서 같은 말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원래 교과서에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실려 있거든요.
많이 힘든 과정이겠지만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라는 사람이 준 영향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요. 아버지는 원래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노력해봤으면 해요.
아버지를 미워하는 감정이 든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그 어떤 것도 받아주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신 스스로 그 마음을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다만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펼쳐질 당신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후회하지 않을 만큼 해보는 것은 당신을 위해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한테 하고 싶었던 얘기를 편지로 전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그것마저도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그것 또한 당신의 마음이 내킨다면 말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에게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얘기에 대해서도 옳다 그르다, 상처를 받을 만하다 아니다 등을 판단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요. 어머니의 말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서로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당신이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머니도 당신이 해결해주길 바란다기보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너야’, ‘힘들 때 너에게 얘기할 수 있어서 참 좋다’의 의미로 말하는 거예요. 그저 들어주는 걸로 충분해요.
지선씨, 당신이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너무나 깊고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울 거예요. 하지만 성인으로서 부모가 준 상처에 대해 부모를 고치거나,사과받으려고 하기보다 성인인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당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을 찾아서 조금씩 알아가면서 당신의 자존감을 높여나가야 해요. 당신 스스로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만이 진실이고 변치 않는 사실이니까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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