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반평생 서울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부부가 노후를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어디일까. 보통은 익숙하고 편리한 도시의 아파트거나, 자연의 한적함을 즐길 수 있는 전원주택으로 양분된다. 지난달 서울 성수동 번화가에 지어진 ‘윤슬빌딩’(대지면적 231㎡, 연면적 583.36㎡)은 노후 주거지의 또 다른 대안이다. 건축주는 서울 토박이 50대 부부로, 은퇴를 앞둔 남편(59)은 학원강사이고, 아내(54)는 주부다. 올해 취업한 외동딸(26)과 함께 산다. 부부는 “일찍 은퇴하는 직업 특성상 노후 대비를 위해 30대 때부터 집을 이용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상가주택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수익만큼이나 우리가 품었던 집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했다”고 말했다.
상가 위 중정형 주택
부부는 7년 전 땅을 샀다. 지금의 성수동은 유명한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용한 주택가였다. 부부는 서울숲에 왔다가 이 동네에 반해 땅을 알아봤다. “숲과 가까웠고, 동네도 반듯하고 평평했어요. 붉은 벽돌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풍경도 아름다웠고요.” 부동산은 부부의 예산에 맞춰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땅을 소개했다. “1964년에 지어진 작은 단층집이 있었어요. 당시에 개발 제한으로 투자가치가 높지 않아 비교적 저렴했어요.” 부부는 상가주택에 대한 기약도 없이 땅을 샀다. 다행히 5년 뒤 개발 제한이 풀렸다. 남편의 은퇴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부부는 30년 가까이 계획해온 꿈을 실행하기로 했다. 부부는 “오랫동안 집을 짓는 것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노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며 “우리 가족만 똘똘 뭉쳐서 살기보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야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5층 규모의 집은 지하 1층~3층이 상가이고, 4~5층, 다락과 옥상이 세 식구의 주거공간이다. 설계를 맡은 정수진 건축사(SIE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3층 상가 위에 가족이 쓸 중정(中庭ㆍ집 안 건물과 건물 사이의 마당)을 올렸다. 거실과 식사공간, 주방이 디귿(ㄷ)자 형태로 중정을 감싸 안는다. 널찍한 주방과 6인용 테이블이 있는 식사 공간은 노후에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원했던 부부의 바람을 충족한다. 부부는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도 다같이 식사하는 게 힘들고, 주방도 2명 이상 들어가면 복잡해져서 사람들이 모이기에 불편했다”며 “집을 짓는다면 같이 모여 요리도 하고, 대화하는 편안한 식사 공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남쪽을 막고 동쪽으로 활짝 열린 중정은 사생활을 보호하면서도 채광과 환기, 풍경까지 책임진다. 정 건축사는 “좁은 폭의 도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건물과 마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남쪽을 막았고, 옆 건물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위치에서 동쪽을 열었다”며 “중정은 먼 서울의 풍경뿐 아니라 근경과 집 내부에서 가족끼리 보이는 풍경도 모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부부는 중정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좋아하는 식물을 심고, 브런치도 즐긴다.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햇빛이 중정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아침 햇살이 아까워서 밖에서 밥을 먹었어요. 비가 오면 처마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게 보이고, 바람이 불면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칩니다. 아파트에 살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에요.”
결혼 30년 만에 처음 생긴 방
집은 일과 육아에서 자유로워진 중년의 부부에게 각자의 공간을 제공한다. 아내에게는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의 방이 생겼다. 아내는 “손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예전엔 제 방이 없어서 거실이나 주방에 물건을 펼쳐놨다가 가족들이 오면 치워야 하는 게 아쉬웠다”며 “이번에는 계단 밑이라도 좋으니 저만의 공간을 꼭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했다. 다락과 옥상을 차지한 남편은 취미인 독서와 음악감상, 텃밭 가꾸기를 논스톱으로 즐긴다.
성인인 딸에게도 전용 발코니와 욕실이 생겼다. 아파트에서 주방 베란다 뒤에 있는 방을 주로 썼던 그는 햇빛이 잘 들고 탁 트인 전망의 방을 원했다. 발코니는 외부의 시선은 걸러주고, 햇빛과 전망을 내부로 들인다. 욕실이 있는 방은 다정한 아침을 만들어줬다. 딸은 “예전에는 아침에 잠이 덜 깬 얼굴로 서로 짜증을 내곤 했는데, 이제는 방에서 씻고 준비를 마치고 나와 기분 좋게 서로 인사를 한다”고 했다. 정 건축사는 “집은 가족끼리 다 보여주고 사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개인이 숨어서 가장 편하게 쉬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며 “사적인 집 안에서도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거실은 각자의 사적인 공간을 연결한다. 층고 6m에 달하는 거실은 개방감을 주는 동시에 층의 경계를 지운다. 5층에 있는 각자의 방에서 나오면 거실이 내려다보이고, 거실에서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보인다. 부부는 “이 집은 서로 숨어 있듯 각자의 시간을 누리기 때문에 같이 있을 때 더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집의 외부는 성수동의 익숙한 풍경처럼 붉은 벽돌로 마감됐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벽돌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 건축사는 “크기와 종류가 서로 다른 세 가지 벽돌이 규칙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면서 집의 큰 단면을 분할해주고 리듬감을 준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도 자연스럽게 그 흔적이 느껴지는 재료라는 점에서 부부가 보낼 노후와도 가장 어울리는 재료다.
무려 30여 년을 꿈꾼 집에서의 노후는 어떨까. “우리가 잘나서 이 집을 지은 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빛을 받아서 지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도 빛을 반사하듯 남은 생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