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
④ '입법 제안' 35일 만에 받은 고용부 답변서
5가지 제안 모두에 사실상 부정적인 답변?
"국가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 맞나요
편집자주
부당한 현실을 보도했는데, 그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만큼 기자들을 허탈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지난 1월 ‘중간착취의 지옥도’ 기획기사에서 파견·용역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임금 착취 실태를 보도했고, 2월부터는 중간착취 금지 입법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여정을 담은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를 비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이게 고용부 답변서라고요? 경총 답변서인 줄 알았어요.”
한국일보는 3월 고용노동부에 파견·용역 노동자들의 중간착취를 막을 수 있게 법을 고치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안 시도부터 답변을 받기까지 장장 두 달 가까이 걸렸죠.
어렵게 받은 답변서의 내용은 허탈함 그 자체였습니다. 노동 전문가들에게 보여줬더니, 사용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답변서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중간착취 금지 입법을 폄훼하기 위한 고의적 왜곡이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었습니다. 조선소에서 이미 하고 있듯이 용역업체를 거치지 않고 전용 계좌를 통해 노동자들이 노무비를 받게 하자는 제안에 고용부는 "노동법 영역에서 에스크로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도급 등에서 발생될 수 있는 임금 체불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 (임금을 중간에서 일부 떼이는 중간착취 금지라는) 귀사에서 제안하는 목적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도급업체의 임금체불도 넓은 의미에서 중간착취인데 굳이 둘을 분리해서 제도 도입을 반대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노동 정책을 총괄하는 고용부의 답변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취재팀의 질문 5개에 대해 모두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했으며, “추진해 보겠다”라는 답변은 없었습니다. "신중한 검토"는 사실상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통 쓰입니다.
한국일보는 당장 '파견 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폐지하자거나, 간접고용 노동자를 모두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제안한 게 아닙니다. 일단 원청이 주는 노무비라도 중간에 파견·용역업체가 착복하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어렵다고 하네요.
취재팀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중간착취를 완화할 다른 대안이라도 제시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전혀 없었죠.
철저히 용역·파견업체 편에 선 고용부. 왜 23년간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한 달에 수십~수백만 원의 임금을 중간에서 떼이고 있는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정부의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장관도, 차관도, 국장도... 취재팀 만남 거부
취재팀은 3월 초 고용부 대변인실에 이재갑 당시 장관 혹은 박화진 차관을 만나 ‘중간착취 금지 입법 질의서’를 전달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장·차관 면담이 어렵다면 근로기준법, 비정규직 정책 등을 담당하는 근로기준정책관(국장급 공무원) 면담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무게감이 맞지 않다” “바쁘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해 근로기준정책과장, 고용차별개선과장 두 분을 만났습니다. 만남 일정을 잡는 데만 3주가 걸렸고, 답변서를 받기까지 또 35일이 걸렸습니다.
고용부는 법을 고치거나 제도를 만들어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입법이야 국회에서 통과돼야 하지만, 정부가 직접 법안을 발의하거나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지지를 표명하면 그 법의 통과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그런데 앞서 취재팀이 보도한 국회의원들의 답변서와 비교해도 고용부 답변서는 제안 자체에 대해 전체적으로 부정적 내용들이 가득했습니다.
정책 부처이기 때문에 모든 사안에 면밀한 검토가 전제되어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중간착취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풀고 싶은 의지조차 감지할 수 없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제안 ① “원청이 노동자에게 임금 직접 지급하게 하자”
고용노동부 답변(요약)
(간접고용이) 용역, 노무도급, 위임, 도급 등으로 개념이 혼재돼 사용되는 경향이 있고, (한국일보가) 제안하는 임금 지급방식은 대상을 명확히 설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 또 전용계좌를 통한 임금 지급방식 제도화는 원청이 하청 인력 운영에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등 의도치 않은 부작용도 우려됨.
원청이 간접고용 근로자에게 노무비를 전용계좌로 직접 지급하도록 하는 방안은 아주 간단하게 중간착취를 막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고용부의 답변서는 이 단순한 방안도 부정적인 의견으로 가득했죠.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임금 직접 지급제가 원청이 하청 인력 운영에 개입하는 것이라면, 발전소와 건설업에서 이미 시행하는 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
“사업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실제 도급에는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원청 사업장에 인력만 공급하는 ‘노무 도급’에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죠.”(권영국 해우 법률사무소 변호사)
취재팀이 제안한 임금 직접 지급제도는 일부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건설업에 임금 직접지급제를 법제화했고, 고(故) 김용균씨 사망 후 심각한 중간착취 문제가 드러났던 화력발전소도 경상정비 분야에 전용계좌로 임금을 지급하는 ‘적정 임금 지급 시범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건설업처럼 극심한 중간착취와 임금체불이 많이 알려진 곳, 발전소처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곳에서만 이런 제도를 운영하겠다는 걸까요. 다른 간접고용 노동자는 계속 중간착취를 당하라는 걸까요.
제안 ② “파견업체가 정해진 만큼만 수수료를 떼게 하자”
고용노동부 답변(요약)
(1)파견수수료 상한 설정 : 현행 파견법상 허용되는 업무의 범위와 내용이 다양해 적정한 수수료의 수준, 어떻게 설정하고 제시할 것인지 신중한 검토 필요.
(2)근로계약서에 파견 수수료 명시 : 파견 순이익까지 명시하도록 하는 것은 경영상 비밀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는 의견도 있는 상황. 파견 수수료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올해 추진하고 전문가 의견을 수렴할 예정임.
직업소개소에서 일을 구하는 노동자에게는 1%까지만 수수료를 뗄 수 있도록 법(직업안정법 19조)으로 규제하고 있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파견업체의 수수료 규제에는 부정적입니다. 전문가 의견은 어떨까요. “파견법은 중간착취를 합법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규제를 충분히 둘 수 있어요. 직업안정법과 연동해 수수료 상한을 두는 것도 의미 있어 보이고요.”(권영국 변호사)
파견 노동자들이 떼이는 수수료와 자신의 임금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근로계약서에 명시하자는 제안에는 ‘경영상 비밀’을 제한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정부가 공공부문뿐 아니라 민간까지 남녀 간 임금 차이를 공개하도록 하는 ‘성별 임금공시제’를 추진하고 있는데, 파견 수수료 명시도 이런 제도와 다르지 않아요. ‘경영상 비밀’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파견업체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정흥준 교수)
제안 ③ “사용자 개념을 원청으로 확장하자”
고용노동부 답변(요약)
(사용자의 개념을 ‘실질적으로 근로자의 근로 조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로 넓히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의 개념이 모호해 노사 갈등이 가중되고 현장 혼란이 증가할 가능성도 고민해야 함. 특히 노조법은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을 규정하고 있어, 불명확한 사용자 판단 기준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도 위배될 우려가 있음.
원청 사업주에 대해 단체교섭과 쟁의 행위의 당사자성을 인정하는 경우 민법 상의 도급계약 등이 형해화되어 민법상 계약에 대한 상당한 제한으로 작용할 우려도 있음.
전문가들은 특히 이 답변에서 여러 번 ‘경총’을 언급했습니다. 노동법은 '계약의 자유'가 갖고 있는 결함을 수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노동법을 보완해 나가야 할 공무원들이 오히려 계약의 자유만 강조하기 때문이죠.
“오히려 원청이 사용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데 고용부는 거꾸로 얘기하고 있어요. 경총 의견을 앵무새처럼 대신 답변해주는 것 같아요.”(권영국 변호사)
“자유시장에서의 계약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보완하자는 것인데, 계속해서 자유계약 논리만 얘기하고 있어요. 경총에 질의하면 비슷하게 답변할 거예요.”(정흥준 교수)
그래서 경총에도 같은 질의서를 보냈으나 경총은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고용부의 인식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정부는 지난달 그동안 미뤄온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 등 3가지를 비준했습니다. ILO 기준은 "노조와 하청·파견 노동자의 고용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자 사이의 단체교섭은 항상 가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법은 여전히 근로계약을 맺은 자만 사용자로 보고 있죠. 이에 전문가들은 내년 핵심협약 발효 전 조속히 바꿔야 할 법 중 하나로 사용자 개념 확장을 꼽고 있습니다.
올해 1월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처벌 대상에 ‘경영 책임자’를 명시, 원청도 사용자 범주에 넣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9년 고용부에 사용자 개념 확대를 권고했고, 국회에서는 17대(2004~2008년)부터 매 국회마다 이 법안이 발의됐죠.
또 전문가들은 고용부가 답변한 ‘죄형법정주의 원칙 위배’ 역시 “전혀 상관없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갈했습니다.
고용부는 유체이탈, 청와대는 만남 거부
고용부는 나머지 두 질문인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가이드라인)에 대한 법적 구속력 향상,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법 제정’에 대해서도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특히 ‘거절’의 이유 중 눈에 띄는 것은 “간접고용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범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이걸 정의하고 범위를 정해 적절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게 고용부의 역할 아닌가요.
“범위가 모호해서 법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상황을 이유로 못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체이탈’이죠. 자신들의 책임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아요. 질의서 제안은 다 거절하면서도 ‘우리가 이런 정책을 가지고 있다’는 대안은 하나도 없잖아요.”(정흥준 교수)
취재팀은 고용부의 답변을 기다리며 지난달 청와대에 일자리 수석 혹은 관련 담당자와의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간접고용 문제엔 고용부뿐 아니라 경제 부처 등 여러 부처가 연관돼 있고 청와대의 의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고용부가 적절한 설명을 할 것”이라며 거절했습니다. 고용부의 입장이 정부의 입장이라는 거죠.
고용부도 청와대도 중간착취의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위한 법을 만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모두 사용자의 논리라는 점은 생각할수록 참담합니다. 1월 ‘중간착취의 지옥도' 기사를 읽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한국일보에 보내 온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국가는 쉽게 말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공성이라는 가치이기도 하다. (중략) 국가는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겐 국가가 있나요.
▶중간착취 문제에 대한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요청하는 국민청원 링크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Temp/trYNUS
▶고용노동부 답변 전체를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52016370005856
▶중간착취의 지옥도 기사 전체를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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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ookilbo.com/Series/S20210121140400011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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