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엄마] <6>조산사 김옥진
38년 동안 받은 아기만 1만 명 이상
그가 ‘자연주의 출산’ 고집하는 이유
편집자주
조산사를 아세요? 과거에는 산파라고 불렸죠. 간호사 면허를 가진 이가 1년간 조산수습과정을 마치고 국가고시를 치러야 조산사 면허를 딸 수 있습니다. 출산을 돕는 전문 의료인인 거지요. 달리 보면,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가장 먼저 안아주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산부인과가 많지 않았던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조산원 출산이 흔했습니다. 요즘에는 자연주의 출산에 관심이 많은 임신부들이 바로 이 조산사들을 찾지요. ‘산파 엄마’로 39년째 일하고 있는 김옥진(60) 아기탄생조산원 원장을 20일 만났습니다. 1만 명 이상의 아기들을 받은 마음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요.
애 낳았어요? 옆에 사진기자님은? 아이쿠, 결혼도 안 했어요? 내가 이렇게 사람 만나기만 하면 그것부터 물어봐요. 하하하하. 이것도 직업병인 거지.
내가 이 동네(경기 의왕시)로 이사 와서 플리마켓(벼룩시장)에 갔다가 ‘뽑기’에 당첨이 된 거예요. “김옥진씨~!”하고 부르길래, “저요, 저요”하면서 손 들고 나갔더니, (행사를 주최한) 공방 주인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에요.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더라고요. “어머, 선생님!”하면서 손을 덥석 잡지 않겠어요. 알고 보니 내가 애를 받아준 사람인 거야. 가만 있어 보자. 조산사 수련 기간 1년까지 치면, 벌써 39년째 애를 받고 있잖아요. 받은 애기가 몇 명쯤 되냐고요? 그걸 어떻게 알아. 한 1만 명쯤 되려나.
◇전국 돌며 받은 아기만 1만 명
한때는 내가 제주도부터 강원 양양군까지 전국을 돌면서 애를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여자’처럼 다녔어. 우리 조산원으로 오는 엄마들뿐 아니라 자기 집에서 애 낳겠다는 사람들까지 쫓아다닌 거지. 나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여성운동이라고도 생각했거든요. 그만큼 자연주의 출산을 알리고 싶었어요.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서 ‘원정 산파’는 안 하려고 했는데, 다음 달엔 어쩔 수 없이 충남 서산에 가야 해요. 그 엄마가 큰아이는 조산원에서 자연주의 출산을 했는데, 둘째는 집에서 낳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 내가 올해 만으로 예순이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출장 갈 수 있겠다 싶어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잠시만요. 그 서산 임신부한테 카톡(카카오톡 메시지)이 왔네. 하하하. 이것 좀 보세요. 오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기에 그럼 절 운동을 서른 번쯤 하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이렇게 보내왔네요. “네, 양심은 있으니...”하더니 “스무 번만 하면 안 될까요”라고. 이런 이모티콘이랑 함께요. 귀엽지 않아요? 이젠 산모들이 딸 같아요. 날 찾아오는 엄마들이 진짜 내 딸들 나이이기도 하고.
절은 왜 시키냐고요? 운동 삼아서요. 이건 불상 앞에서 하는 절하고는 다르다고요. 다 아이를 낳을 때 도움이 되는 운동이에요. 많이 움직여야, 엄마한테도 애기한테도 좋다니까. 또 생각해보세요. 절하면서 엄마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어요. 뱃속 아이가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할 거 아니에요. 그런 마음도 담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보통 여자가 아이 가졌다고 하면 뭐든 못 먹여서 안달이야. 근데 그게 좋은 게 아니거든. 엄마 뱃속에서 아이를 그렇게 살 찌우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보세요. (모형을 들어 보이면서) 이게 자궁이고 골반이에요. 아기가 이렇게 엄마 뱃속에서 있다가 진통이 시작되면 자궁경부가 얇아지면서 열리고 아기가 내려와요. 아기들은 천재예요. 이쪽에 탯줄이 있으니까 대개 태반을 바라보고 있다가 엄마 골반 모양에 따라서 스스로 (나오기 편한 길을 찾아) 나와요. 제 어깨가 빠져 나오기 좋도록 돌면서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태아가 너무 살이 찌면 그렇게 움직일 수가 없어요. 아기가 스스로 못 나오면 (밖에서) 잡아 당겨야 하거든요. 그렇게 당겨서 나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거든요. 견갑난산이라고 태아의 어깨가 엄마 골반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거죠. 그럼, 어깨뼈나 쇄골이 부러져서 아기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임신부한테 ‘많이 먹으라’고 하는 건 악담이야. 엄마가 반드시 식이 조절하고 많이 움직여야 해요. 특히 밀가루나 당류만 덜 먹어도 도움이 돼요. 그래서 저는 임신부들한테 임신 30주부터 뭘 먹었는지, 운동은 얼마나 했는지 다 기록하라고 하죠. 그렇게 출산 전부터 출산 후 보름까지 관리를 해줘요. 요즘은 영상통화란 게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모유 수유하는 자세까지 봐줄 수 있잖아요. 수유에 성공했을 때 기쁨까지 함께 나누고요. 그러니까 조산사는 한 여성이 엄마가 되어가는 걸 돕고 또 지켜보는 일이기도 하죠.
◇출산은 엄마와 태아의 교감
자연주의 출산이 뭐기에 그러냐고요? 간단히 설명하면, 의료적인 개입 없이 아이를 낳는 일이죠. 유도 분만이나 무통주사 같은 약물 사용, 회음부 절개 같은 시술을 하지 않고요. 생각해보세요. 원래 우리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어요. 그 마을에서 아이를 많이 받아본 산파가 집에 와서 받아주거나, 심지어 산파를 부르러 간 사이에 엄마 혼자 아이를 낳기도 했죠. 그런 본래의 자연스런 출산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건강한 임부는 약물을 사용하거나 시술을 하지 않아도 잘 낳을 수 있어요. 물론 고혈압이나 출혈성 질환이 있는 임부, 둔위 태아(역아), 다태아 같은 경우는 권하지 않아요. 고위험군으로 일컬어지는 만 35세 이상 임부도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저는 받아요. 요즘은 산모의 연령이 높아지기도 했고요.
약물을 쓰면 뭐가 좋고 나쁜지 임부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선택하도록 해야 해요. 무통주사만 해도 마치 ‘아프지 않을 권리’인 것처럼 홍보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거든요. 우리가 몸살 났을 때 자면서도 이리 눕기도 하고, 저리 눕기도 하면서 뒤척이는 게 왜 그렇겠어요. 순환이 제대로 안 되니까 나도 모르게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임부도 마찬가지예요. 진통을 하면서 자꾸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바꾸는 건 아기가 나오기 편한 자세를 찾도록 서로 교감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무통주사 때문에 근육이 맥을 놓고 있으면 그걸 못하는 거죠.
출산 직전에 대개 약물로 관장을 하는데, 그것도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자궁을 수축시키는 호르몬이 프로스타글란딘인데, 이 호르몬은 장이 싹 비워져야 분비되거든. 그러니 진통 전에 자꾸 화장실에 가게 되는 거예요. 장이 비워지면 옥시토신까지 함께 나오죠. 그렇게 호르몬의 바퀴가 딱딱 맞춰지면서 진통이 시작되는 거예요.
아기를 낳은 직후에도 왜 젖을 물리라고 하는 건데요. 아기가 나오고 난 뒤에 태반까지 배출되고 나면 자궁 안에 상처가 남거든요. 그때 자궁이 확 풀려버리면 피가 수도꼭지 튼 것처럼 나와요. 그럼 산모가 위험해질 수 있죠. 그때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 엄마 몸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돼서 자궁을 자연적으로 수축시켜요. 엄마와 아기 사이에 애착도 형성되죠. 두 사람 모두 아드레날린 분비가 왕성해지거든요. 아기도 산도를 빠져나오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고통을 회복시켜주는 거예요. 그러니 출산 직후에 엄마가 아기를 안아주거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건 큰 의미가 있어요. 두 사람 모두를 살리는 일이죠. 그래서 신생아실을 없애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에요. 적어도 출산 직후 4시간 만이라도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있도록 해야 해요.
얘기를 들어보니 어때요. 이렇게 본래의 출산은 엄마와 태아가 자연스럽게 교감하면서 이뤄지는 일이에요. 약물을 써서 인위적으로 제어하면 어딘가에서는 엇박자가 날 수 있어요. 분만이란 게 여성의 몸에서 아기를 빨리 꺼내는 게 능사인 일이 아닌데 어느새 우리는 그렇게 여기고 있진 않나요?
아기 낳기 편한 자세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스스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찾을 수 있어요. 기도하는 것처럼 엎드린 자세가 편한 사람도 있고, 옆으로 돌아눕거나 조그만 변기처럼 생긴 분만 의자에 앉아서 낳는 산모도 있어요. 벽에다 손을 대고 서서 낳기도 해요. 그런데 병원에선 어떤가요. 모두 똑같이 분만대에 눕죠. 그건 산모가 아니라 의사에게 편한 자세예요. 그러니까 자연주의 출산은 달리 말하면, 여성이 자기 주도성을 찾는 출산이에요.
◇간호사 되자마자 조산사 수련
이 일을 왜 하게 됐냐고요. 그러게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유난히 멋있어 보였던 양호 선생님(현재의 보건교사)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간호대학에 진학해서 처음 실습 나간 산부인과 병동에서 맞닥뜨린 분만실 경험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 병동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해준 선배 조산사의 프로다운 모습에 반해서라고 해야 하나.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됐겠죠.
어쨌든 1983년에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나는 바로 조산사 수련을 받았어요. 내 일이 그거라고 생각했거든. 간호사를 몇 년 하다가 조산사 면허를 따는 경우는 있어도 곧장 조산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죠. 그러니까 지금 나처럼 오래 일한 조산사가 별로 없어요.
1년간 조산사 수련을 할 때만 해도 내가 내 이름으로 조산원을 열 생각은 못했죠. 그런데 이 일을 하면 할수록 그런 확신이 드는 거예요. 약물이나 시술 없이도 아기가 건강하게 나올 수 있다는, 아니 그런 분만이 옳다는.
초기에는 나도 뭘 얼마나 많이 알았겠어요. 날 찾아오는 임신부들이 내 스승이었어요. 스스로 공부해서 의식이 깨어서 오는 엄마들이 있었거든. 나조차도 딸 둘을 내가 근무하던 병원이나 모자보건센터에서 낳았으니까. 큰아이 때는 탯줄 자르자마자 “김옥진씨, 아기 보세요”하고 보여주곤 바로 신생아실로 데려가 버려서 안아보지도 못했죠. 둘째는 낳고 나서 함께 있었는데 애가 입을 쩝쩝거리기에 ‘왜 그러나’ 했어요. 바로 젖을 물려야 한다는 걸 아무도 안 알려줘서 나도 몰랐던 거야.
그러니 2002년 처음 조산원 문을 열 때 주위에서 다들 말렸죠. 사양 업종이었으니까. 누가 요즘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냐는 거죠. 뭔가 열악하거나 비전문적으로 보이잖아. 하는 수 없이 조산원이 어떤 곳인지 알리려고 내가 직접 거리로 나가서 열심히 명함을 돌렸어요. 배가 좀 나온 여자를 보곤 임신부인 줄 알고 “조산원에서 낳아 보시는 건 어떠냐”고 했다가 면박도 당했죠.
길거리 홍보 효과요? 있었지! 첫 산모가 길에서 만난 사람이었어요. 마침 보건소에서 출산 교육을 받고 나오던 20대 임신부였죠. 내 소개를 한 뒤에 조산원이란 데가 있다고 설명을 하고는 “한번 가보실래요”라고 했더니 따라오더라고요. 조산원에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얘기를 들어보더니 “여기서 낳아볼까요”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해서 내가 셋째 아이까지 받았다니까요. 자연주의 출산을 해보고 좋으니까 그러지 않았겠어요? 첫아이 나올 때 남편뿐 아니라 부모, 시부모가 다 오셨는데 시아버지가 꼭 당신이 출산 비용을 내고 싶다면서 쥐여주고는 고맙다고 했던 게 기억나요.
◇산파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아이고, 아기 낳을 때 별별 산모가 다 있죠. 성격이 나온다니까. 하하. 내 허벅지를 막 꼬집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숱하게 산파 노릇을 해보니 무던한 엄마들이 아기도 잘 낳더라고. 별 걱정이 없는 사람 말이에요. 이거 저거 찾아보고 공부를 너무 많이 해도 도움이 안 돼요. 단순하게 ‘나는 건강해. 병자가 아니야. 잘 낳을 거야’하는 사람이 대개 순탄하게 낳아요.
임신 기간에 엄마가 걱정 없이 편안하게 보내잖아요? 그럼 신기하게 아기도 태어나서 잘 울지 않아요. 처음에 ‘으앙’하긴 하지만 금방 ‘케헤헤헤’하면서 호흡을 찾죠.
나도 딸 둘을 낳은 엄마니까, 진통하는 엄마들이 측은해 보이지 않겠냐고요? 그러면 안 돼요. 나는 대뇌를 풀가동시키고 있어야 해. 감정 같은 걸 느낄 새가 없어요. 임부 상황을 살피면서 동시에 아기는 큰지 작은지, 이런저런 수치들은 어떤지, 출혈 같은 응급상황에 대비한 약이나 주사기 위치를 종합적으로 확인하죠. 비상시에 달려갈 수 있는 병원에도 미리 연락을 해두고요. 그러면서도 아기 엄마한테 “잘하고 있다”고 해주면서 계속 교감을 해요.
그러니 산파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판단력이에요. 내 손을 떠나서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 빠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해요. 경험이 그만큼 중요하죠. 늙을수록 하기 좋은 일이에요. 하하. 내가 지금보다 나이가 적을 때는 산모 어머니나 시어머니들이 날 보곤 그랬다니까. “아니 산파가 왜 이렇게 젊어요.” 흰머리가 많을수록 신뢰받는 일이 또 있으려나.
힘도 좋고 튼튼해야 해요. 임부와 함께 힘을 주기도, 잡아주기도, 또 받쳐주기도 해야 하니까. 아기가 무사히 ‘응애’하고 나와도 끝나는 게 아니에요. 태반까지 깨끗하게 나오고 자궁이 쫙 수축돼서 출혈이 없는 것까지 확인해야 내 임무가 끝나죠. 그러면 그제서야 ‘고생했네’하면서 ‘이제 미역국 끓여야겠다’ 싶죠.
미역국요? 산모들한테 내가 직접 끓여줘요. 고기 안 먹는 사람한텐 쇠고기 미역국은 안 되잖아요. 황태나, 멸치를 넣어 끓이기도 하고, 들깨가루를 섞어서 만들기도 하죠. 그걸 거의 40년을 했으니, 나처럼 미역국을 후다닥 끓여 내는 사람은 몇 없을걸요.
◇아기를 받는 마음
아기 받는 마음이라…. 그 순간에 나는 내 새끼도, 남편도 잊어요. 내 눈앞의 엄마와 태어날 아기를 위해 존재하죠. 아이 낳으러 온다는 연락이 오면 저는 목욕부터 해요. 목욕재계하는 거예요. 머리를 이렇게 기른 지도 2년이 안 됐어요. 머리 말리는 데 시간을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늘 짧은 머리였죠. 참 지겹게 같은 머리 모양이었네요.
아이를 받을 방은 밝지 않게 간접 조명을 밝혀요. 미리 향초도 켜두죠. 초에 불을 붙이면서 속으로 ‘아가야, 잘 나올 거야. 힘내’라고 하지요. 그런 것들이 나만의 의식이에요. 아기가 나오기 전부터 임신부 옆에 몇 시간 동안 딱 붙어서 손잡고 배 만져주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아가야, 건강하게 잘 나오거라’ 하죠.
평생 아이를 받았고 그게 직업인데도 늘 두렵고 무서워요.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내 실수로, 혹은 내 실수가 아닌 이유로 아기나 산모가 잘못될까 봐. 명상 선생님한테 그런 마음을 털어놓으니까 그건 마치 대자연 앞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본능적인 감정이라고 하더군요.
조산원을 하면서 힘든 일이 왜 없었겠어요. 극히 드물지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죠. 아기가 멀쩡히 건강하게 잘 태어나선 두세 시간 뒤에 하늘나라로 간 일도 있었거든요. 며칠 뒤에 부검까지 했지만, 끝까지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 아기가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정말 많이 힘들죠. 하지만, 조산원을 열 때도, 지금도 나를 찾아오는 엄마들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내 경험과 경력으로 최선을 다해 아이를 받아요. 그다음에 올 결과도 내 몫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요.
표면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조산사 혹은 산파, 조산원 원장이지만 그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기를 받을 때마다 진심으로 아기한테 ‘내가 너의 행복과 행운, 건강을 빈단다’ 하거든요. 그 마음이 더욱 절실해져요. 아우, 그 생각을 하니까 또 눈물이 나네. 요즘은 왜 이렇게 울컥 울컥하는지 모르겠어요. 실은 너무너무 힘들어서 ‘아이, 나도 이제 그만할래. 이제 손 놓을래’ 싶거든요. 그러다가도 내가 받은 아이들이 잘 크는 걸 보면 마음이 참 좋아요.
◇황홀 이상의 경험
2006~2007년 즈음 다큐멘터리랑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정말 전화통에 불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한 달에 많이 받을 때는 아이를 23명까지 받았다니까요. 가장 바빴던 해에 꼽아보니 175명을 받았더라고요. 근데 그때 유방암에 걸렸잖아요. 참 웃기죠. 유방암에 걸려서 행복했거든요. 쉴 수 있게 돼서요. 방사선 치료가 끝날 때 마침 세계조산사대회가 유럽에서 열렸는데 제가 굳이 갔어요. 전화벨이 안 울리니 살겠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명절이건, 밤이건, 새벽이건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니 전화가 울리면 받고, 울리면 가야 했거든요. 그다음부터는 제가 여기저기 “나 암 걸렸다”라고 광고하고 다녔어요. ‘그럼, 내가 전화 좀 바로 안 받는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이제 좀 아이를 적게 받아도 되겠지’ 싶더라고요.
산파의 도리요? 따뜻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산모가 어떻게 임신을 했고 어떤 환경에서 임신 기간을 보냈든 조산사는 세상에 나오는 아기를 처음 안아주는 사람이거든요.
출산은 한번쯤 경험해보라고 하고 싶은 일이에요.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보다 더 ‘찐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출산을 황홀한 경험이라고들 하는데, 엄마가 된다는 건 황홀을 넘어서는 일이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대 사건이니까요. 그만큼 인생이 숙성되고, 겸손해져요. 제가 산모들한테 그러거든요. “너는 이제 이 힘으로 살 거야. 이 아이를 낳은 힘으로 남은 인생을 살 거야. 이제 무서운 게 없을걸.” 엄마들은 진짜 그래요.
◇내가 받은 아이들에게
출산율이 줄어드니 조산원을 찾는 사람 수도 확 줄어들었어요. 인공수정을 하는 부부가 늘어난 것도 원인이 된 것 같고요. 인공수정을 한 경우엔 출산 때 출혈 가능성이 높으니 병원에서 많이 낳거든요. 저도 이제는 임부 수를 조절해서 받고 있기도 하고요.
저는 이 일이 옳아서 아직도 해요. 후배 조산사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몇 년 가지 않아 없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요. 지금도 조산원은 전국에 열다섯 군데밖에 없어요(대한조산협회 통계). 한 해 배출되는 신규 조산사 수도 십여 명 정도에 불과하고요. 하기는, 산부인과를 택하는 전공의 수도 점차 줄고 있다지요.
나중에 언젠가는, 내가 내리 아이 셋을 받은 집 리스트를 쫙 뽑아서 유랑을 다니려고요. “너 나올 때 이랬어” “내가 네 몸을 제일 먼저 잡은 사람이다” 하면서요. 내가 기록해둔 출생일지를 보여주면 얼마나 신기해할까요. 조산원에 왔을 때 아이 엄마 상태, 진통 간격, 태아 심박동수, 출생 직후 키나 몸무게 같은 걸 적어둔 기록이죠. 내가 아이 넷을 받은 집도 더러 있거든요. 넷째 아이 받을 때 갔더니 큰애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됐더라고요. “너 나올 때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했죠. 그런 얘기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막 태어난 생명이 얼마나 힘찬지 아세요? 힘들게 빠져나오느라 지칠 만도 한데 참 힘차요. 자연스럽게 제 힘으로 나오니 그런 거 아니겠어요? 아기 몸의 양수를 닦아주면서 “아이고, 애썼어. 기특하다. 반가워. 잘 나왔어!” 해주죠. 이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모든 게 아기가 건강하게 나왔을 때 느끼는 희열과 상쇄돼서 지금까지도 하고 있나 봐요.
내가 받은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요? 따뜻한 사람이 되어라. 그런데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자랄 거예요. 조산원을 연 해(2002년)에 받은 아이들이 올해 대학생이 된 거 아세요? 하하.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 때 모습을 찍은 사진을 선물로 줬죠. 그렇게 자신이 ‘응애’하고 터뜨린 첫울음을 기억해주는 ‘산파 어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 마음이 조금은 뜨끈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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