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전 장관이 본 한미정상회담
송민순(72) 전 외교부 장관은 자타공인 '대미 협상가'다. 1991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에 참가했고, 2005년 북핵 6자회담에서 북미 당국자와 수개월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외교부 장관(2006년 12월~2008년 2월)으로서 '한미동맹 홀대' 논란 속에서도 한미관계를 적절하게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 전 장관은 지난 26일 서울 용산의 개인 사무실에서 가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한미동맹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한 선언"이라고 총평했다. 한반도에 국한됐던 한미동맹을 동북아와 아세안(ASEAN)을 넘어 중남미까지 전 세계로 확대하는 동시에 "향후 수십 년 동안 동맹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고 못박으며 동맹의 수명을 다음 세대로 연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가시적 성과 외에 정상회담의 행간을 조목조목 읽어내고 평가했다. 특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주도의 다자협의체인 쿼드(Quad)와 미중 갈등의 최전선인 '대만해협' 문제가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에 대해 "미국의 중국 봉쇄 전선에 한국이 동참한다는 선언"이라고 규정했다. 정상회담 직후 정부가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대만 얘기는 일반론적 언급'이라는 취지로 해명한 것에 대해선 "미국과 중국이 우리를 가볍게 보도록 만들 수 있다"며 "공동성명의 잉크도 마르기 전 딴소리를 하면 나중에 누가 우릴 믿겠느냐"고 지적했다.
정부가 한미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긍정적인 호응을 기대하는 것에 대해선 섣부른 낙관론을 경계했다. 한미 공동성명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판문점 선언·싱가포르 공동성명'을 명기했지만 "대북 제재 해제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이 당장 협상장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임기 1년을 남겨둔 문재인 정부의 외교·대북정책과 관련해선 임기 내 성과 도출을 서두르다가 주변국에 휘둘릴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다음 정부가 언제든 비핵화 협상에 착수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음은 송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한미동맹의 범지구적 확장 선언인 셈
_지난 21일(현지시간)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를 한마디로 요약해달라.
"한미동맹을 범지구적으로 확장한 선언이었다. 동북아와 아세안은 물론 중남미 지역 문제까지 다뤘으며 첨단기술·과학·보건·환경 분야 등으로 동맹의 영역을 넓혔다. 한국의 역량에 걸맞게 역할과 책임이 확대된 것이다."
_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는다면.
"중국 견제와 봉쇄에 한국이 동참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동맹 범주에 반도체와 5G 등 첨단기술 분야를 적용하고, 안보 분야에서는 쿼드뿐 아니라 대만해협 문제까지 명시했다. 현 세계 정세와 안보 환경 속에서 한국이 잡아야 할 자리를 선정한 것이자, 미중 사이에 미국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미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조 바이든 정권 초반 중국 포위망 구축의 기초를 다진 셈이다."
'대만' 공동선언 명기는 뼈 있는 대목
_정부는 회담 이후 "공동성명에 언급된 대만 문제는 '일반론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라는 입장을 밝혔는데.
"'대만 문제'가 일반론적 이야기였다면 왜 굳이 공동성명에 담나. 누가 봐도 '뼈'가 있는 대목이다. 대만 문제 명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맞물린다.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언급한 것은 바꿔 말해 '대만해협의 평화가 위협당하면 주한미군을 투입할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둔 셈이다. 대만에 대한 언급이 한미동맹 강화 차원이라면 의미가 있지만, 대북정책과 관련한 표현(판문점 선언·싱가포르 공동성명)의 대가로 받았다면 오판이다. 성명에 이미 명시됐고 미국은 정권이 바뀌어도 기존 합의를 동맹의 역할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_정부는 '한중 간 특수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회담 이후 이렇게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었다면, 애당초 공동성명에 대만 문제를 명시하지 않는 게 맞다. 일단 선택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지금 와서 '그런 의미가 아니다'라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면 누가 한국을 신뢰할 수 있겠나."
_중국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혹스러울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방한에 각별한 공을 들이던 한국의 모습과 상충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텐안먼(천안문) 망루에 올라갔다가 이후 느닷없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배치한 박근혜 정부 당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_우리 정부도 '대만해협' 등은 공동성명에 포함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미국은 협상에서 상대의 약점을 찾아 파고든다. 다른 나라들도 협상에 임할 때는 마찬가지다. 임기 말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살피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이라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우리가 '대만해협'을 빼자고 요청했다면 미국은 우리가 가장 원했던 '판문점 선언·싱가포르 공동성명' 표현을 빼자고 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용을 빼기 시작하면 우리로선 성과로 남는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김정은, 받을 '물건' 없어 고민 많을 듯
_한미 정상이 판문점 선언·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대한 존중을 공식화했고, 미국도 "공은 북한에 넘어 갔다"고 밝혔다.
"무엇을 던졌다는 건지 모르겠다. 물밑에서 뭔가 있을 수 있지만 미국이 내놓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받을 '물건'이 없어 고민이 많을 것이다. 두 선언은 실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한반도 평화 정착, 북미관계 정상화, 남북관계 개선 등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한국은 물론 역대 미국 어느 정부도 반대할 내용이 아니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은 싱가포르 공동성명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꺼려 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벤트 외교'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심은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모든 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바이든 대통령이 크게 양보한 게 없다."
_미국도 대북접근에 있어 '외교와 대화'를 강조하고 있지 않나.
"바이든 행정부는 '정교하고 실용적인(calibrated and practical)' 접근법을 펴겠다고 했지만 아직 실체가 없다. 한미는 공동성명에서 북한 인권과 인도적 지원을 언급했다. 북한은 식량과 약품을 말하는 인도적 지원 정도의 언급에는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국이 독자적으로 움직여주기를 바랐는데 이번에 한미가 대북정책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했다. 북한으로선 더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전형적인 대미 카드를 빼들 것으로 보인다."
_전형적인 대미 카드는 무엇인가.
"언어 도발로 시작해 저강도 도발과 전략 도발로 이어지는 카드다."
_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최근 "한미 공동성명에 명시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지대' 개념의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북한의 비핵화지대화 주장은 비핵화 시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일차적 목적은 대북 억제이지만 실제로는 동북아 안정을 위한 균형추 역할이 커져왔다. 그래서 한미가 주한미군 주둔을 전제로 한 비핵화 협상을 벌여온 것이다. 정 장관의 발언은 역대 정부 입장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한반도 비핵화가 주한미군 철수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정부 스스로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北 움직이기 위해선 美 움직여야
_반도체·배터리 분야 및 5G까지 첨단기술 분야의 양국 협력이 구체화했다.
"안보와 첨단기술 분야를 아우르는 동맹으로 진화하겠다는 시도다. 다만 안보의 주체는 정부인데 기술협력의 주체는 민간 기업이다. 안보는 정부가 움직이지만 기술협력은 기업이 경제 논리로 움직인다. 둘을 어떻게 화합할 수 있을지가 과제다."
_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는 향후 안보 환경에 어떤 변화를 미칠 수 있나.
"한국 입장에선 사거리 제한 없는 미사일 개발 환경을 만들었다. 이미 북한 전역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 능력을 갖춘 마당에 안보상 추가적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할 명분을 만든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현실적인지 의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_문재인 정부의 남은 1년 동안 외교적 과제는 무엇인가.
"남북대화를 포함해 임기 내에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주변국들에 휘둘리는 '을'의 처지가 되기 쉽다. 현 정부는 임기를 넘어 다음 정부가 북핵 문제를 협상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것들을 착실히 이행하면서 동맹을 단단히 관리해야 한다. 북한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미국을 움직여야 한다는 전략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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