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 유통기한→소비기한으로 바꿔
국내도 법안 발의됐으나 국회에서 방치
나무를 자른 땅에 식재료를 재배하고, 해양 생태계를 망치며 물고기를 잡고, 공장식 축산으로 탄소를 배출하며 만들어낸 음식 한 그릇. 우리는 이를 그만큼 귀하게 여기고 있을까.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생산된 음식물의 약 30%가 버려진다. 2019년 한국에서만 매일 1만4,314톤의 음식물이 버려졌다. 게다가 음식물이 부패하거나 소각되는 과정에서만 885만 톤(2013년 기준)의 온실가스가 추가로 배출됐다.
환경단체와 식품·위생 전문가들은 막대한 음식물 쓰레기를 작은 제도 개선 하나만으로 최대 50%까지 줄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식품에 표기된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은 부패한 식품이 판매·섭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지표다. △유통기한은 ‘판매가 가능한 시점’을 △소비기한은 ‘품질이 떨어졌지만 소비자 건강에 지장 없을 것으로 인정되는 시점’을 의미한다. 이 밖에 △품질유지기한(식품의 품질이 전혀 바뀌지 않는 기한) △종료기한(식품 섭취가 가능한 최종 기한)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통기한은 가장 보수적인 지표로 평가 받는다. 품질에 전혀 지장이 없는 품질유지기한보다도 짧은 탓이다. 한국은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에 따라 일정한 시험을 거쳐 유통기한을 정하는데, 보통 품질유지기한의 60~70%선에서 설정된다. A식품이 제조된 지 10일 만에 부패하기 시작한다면, 유통기한은 7일이 되는 식이다. 또 유통기한을 위반해 식품을 판매할 경우 강제 폐기·영업정지·허가취소 등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유통기한을 넘겨 제품을 섭취해도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 A식품의 경우 3일 더 아무 품질 변화 없이 제품을 섭취할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어느 시점까지는 건강에 지장이 없다.
실제 한국소비자원이 2009년 부패에 가장 민감한 유제품을 대상으로 시간에 따른 △수소 이온 농도(PH) △일반세균수 △대장균군수 변화를 측정한 결과, 우유의 경우 0~5℃ 냉장보관을 하면 유통기한이 지나도 최대 50일까지 섭취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시중 우유의 유통기한은 평균 9~14일로 알려졌다.
이 밖에 유통기한이 지나도 △치즈 70일 △건면 50일 △냉동만두 25일 △식빵 20일까지 섭취가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음식물쓰레기 중에서 유통기한 때문에 버려지는 것은 최대 57%까지로 추정된다. 지나치게 짧은 판매기간 탓에 유통과정에서 폐기되는 식품이 상당하고, 가정에서도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오해해 먹을 수 있는 제품을 버리기 때문이다.
2013년 환경부는 음식물쓰레기의 약 57%가 유통·조리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밝혔다. 한국식품기술사협회는 2011년 식품 폐기물 중 32%가 기한 내 판매가 되지 않아 발생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2013년 성인 2,03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약 56.4%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폐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미 유럽연합(EU)·캐나다·일본·호주·영국·홍콩·중국 등이 유통기한을 쓰지 않는다. 영국은 2011년부터 유통기한을 삭제했다. 대신 품질유지기한과 소비기한을 식품에 표기하도록 하고, 소비기한이 지난 식품의 판매만을 금지한다. 미국은 유통기한을 쓰지만, 소비기한도 함께 기재한다. 소비자들이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오해해서 아직 먹을 수 있는 식품을 폐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도 2018년 유통기한을 식품기한 지표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비기한제 논의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지난해 7월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꾸는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같은해 11월 국회 보건복지소위에서 “식품 안전성에 문제가 없는지 추가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논의가 미뤄지고 있다.
환경단체 소비자기후행동 관계자는 “소비기한제는 이미 국제적으로 안전성과 효과가 검증된 제도인 만큼 도입을 늦출 이유가 없다”며 “관련 법안이 발의되어 국회에 계류돼 있는 만큼 늦어도 올해 상반기에는 법안 통과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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