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특별사면 가능성에 불을 지폈다. 사면 건의를 받고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 기업에 대담한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답한 것이다. '국민 공감대'와 '기업 역할론'을 말한 건 '사면을 위한 외형적 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으로, 문 대통령이 8ㆍ15 광복절 특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로 해석됐다.
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으나, 이후 조금씩 입장을 누그러뜨렸다. 지난달 13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공장을 찾아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를 강조한 것이 분위기 조성용 행보로 읽히기도 했다.
최태원 '사면론' 꺼내자… 文 "기업 고충 안다"
문 대통령은 2일 낮 12시부터 90분 동안 청와대 상춘재에서 4대 그룹 대표 초청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이 참석했다.
청와대 설명을 종합하면, 이 부회장 사면 얘기는 최태원 회장이 먼저 꺼냈다. 최 회장은 '창의적 인재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경제 5단체장이 건의한 내용을 고려해 달라"고 했다. 경제 5단체장은 최근 이 부회장의 사면을 건의했다. 이어 김기남 부회장이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 결정이 신속히 이뤄진다"고 거들었다.
민감성을 의식한 듯 '사면'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진 않았다. 이에 문 대통령은 '경제5단체장의 건의가 사면인가'를 확인한 뒤 "(기업의) 고충을 이해한다. 국민 공감대가 크다.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의 답변은 '이 부회장 사면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문 대통령이 사면 전제 조건으로 '국민 여론'을 들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기업 역할론'을 꺼내 든 것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각한 상황인 만큼 기업 총수가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는 주장에 힘을 실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취임 4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국민 공감대'라는 원칙을 확인하면서 "의견을 많이 듣고 있다"고 여지를 둔 바 있다.
"5대 중대범죄 사면 No" 원칙 위배되는데…
이 부회장 사면은 문 대통령 스스로 세운 원칙과 맞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뇌물 △알선수재 △알선수뢰 △배임 △횡령 등 5대 중대범죄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형을 받은 사범들은 사면 대상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하겠다고 대선 때 공약했다.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권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복역 중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들어 '원칙'보다 '현실'을 택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 왔다. 정권 말 일자리 창출을 포함한 '완전한 경제회복' 목표를 달성하려면 기업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여권 관계자는 "기업인들 사기 진작 측면에서 사면은 중요한 카드"라고 말했다. 4대 그룹이 지난달 한미정상회담 당시 44조 원에 달하는 대미 투자를 약속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찬사를 이끌어낸 것은 상징적 장면이었다.
한다면 8ㆍ15 유력…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사면을 단행한다면, 시점은 올해 광복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여권에서는 사면이냐, 가석방이냐 등 형식을 두고 논의가 이미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반 사면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은 같은 사건으로 구속돼 있는 만큼, '패키지 사면'을 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국민이 입은 고통과 상처가 매우 크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나, 지난달엔 "국민 공감대를 생각해 판단하겠다"고 물러섰다.
다만 '경제 회복'이 사면 이유인 이 부회장과 달리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마땅한 명분을 찾기 어렵다는 게 변수다. 올해 초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통합을 위한 전직 대통령 사면'을 꺼냈다 역풍을 맞았듯, 화합이나 통합 같은 정치적 수사를 국민 여론이 수긍할지는 미지수다.
文 "덕분에 회담 성공적" 감사도
문 대통령이 4대 그룹 총수와 별도로 만난 건 취임 후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자리는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기업들이 44조 원대 대규모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등 정부에 협력해준 데 대해 문 대통령이 사의를 표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오찬 메뉴에는 한미 정상이 함께 먹었던 크랩 케이크가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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