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맨다 레덕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편집자주
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2017년, 어머니들이 장애학교 설립을 위한 주민 간담회에서 무릎을 꿇고 읍소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을 향해서였다. 이 장면의 앞뒤 맥락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학교 가는 길'(2020)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중이다.
다큐 속 어머니들은 처음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거나, 너무 부끄러워서 외출도 잘 못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점차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들은 장애인을 배제하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활동가로 거듭난다.
장애를 저주나 인과응보로 보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태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어맨다 레덕의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는 이 문제를 다룬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레덕은 숲속을 산책하다가 책의 내용을 구상하게 된다. “동화 속 공주가 휠체어를 타고 블루베리를 따는 건 힘들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는데, 곧이어 “휠체어 탄 공주가 어딨어?” 싶어졌고, “진짜 왜 없지?”라고 질문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화 속 장애 재현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곱추인 마녀, 벌을 받아 눈이 먼 소년, 저주로 야수가 되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만나 미남으로 돌아온 왕자, 공주를 돕는 난쟁이... 동화 속에서 장애는 저주이거나 벌이었고, 벗어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이들은 악당이거나 조력자일 뿐이었다. 주인공의 일시적인 장애는 ‘정상’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게 해피엔딩이었다.
레덕은 말한다. 자신이 장애판정을 받았던 20세기에는 아이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다르면 CT를 찍어 원인을 밝히고 아이의 장애를 이해한다. 하지만 의학이 없던 시절에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경유해서 장애를 설명하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장애는 마법이나 업보, 저주, 벌의 문제가 되었다.
각종 이야기들에서 본성이 선한 사람이나 지략이 뛰어난 사람은 결국 장애를 ‘극복’해낸다. 레덕은 대표적으로 그림 형제의 “손을 잃은 아가씨”를 소개한다. 아름다운 아가씨를 탐냈던 악마는 뜻대로 되지 않자 아가씨의 손을 잘라버린다. 아가씨는 ‘손은 없지만’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진실한 사랑을 만나 왕비가 된다. 그리고 신께 기도하여 손도 다시 자라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슴도치 한스”가 있다. 한스는 상반신은 고슴도치이고 하반신은 인간인 소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략이 뛰어나 목동으로 성공하고 임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첫 번째 공주는 한스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공주를 가시로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고 망신을 준다. 두 번째 공주는 한스를 받아들인다. 그는 고슴도치 껍질을 벗고 ‘정상 인간’으로 돌아온다.
소녀는 그저 ‘아가씨’로 불리고, 소년은 ‘한스’라는 이름을 갖는 세계. 아가씨는 순종하고 한스는 한껏 가시를 세울 수 있는 기묘한 정상성의 세계. 레덕은 이 이야기들에 칼뱅파 기독교도였던 그림 형제의 신앙과 성역할과 같은 정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짚는다.
“오래된 동화들에서 신체 훼손과 죽음은 벌이며, 그와는 반대로 아름다움을 얻는 것은 궁극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매우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편견을 바탕으로 상상되었다.
강원래씨는 과거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사고가 나기 전에 장애인들을 많이 보았다면, 사고 직후 그렇게까지 좌절하지 않았을 거다.”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는 지독한 분리주의 안에서는 차별과 편견이 사라질 수 없다. 장애인 탈시설 운동이 성과를 볼 수 있기를, 그리고 차별금지법이 꼭 제정되기를 바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